20190804 주일
사도행전 8:9-24, 겔 36:21-23
마술사 시몬
들어가는 말
아담과 하와는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났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죄로 인해 자기들이 살던 땅에서 홍수로 쫓겨나 몰살당해 죽었다. 야곱은 그 죄로 인해 밧단 아람 라반 삼촌의 집으로 쫓겨 갔다. 이스라엘 백성은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주후 70년에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여져 세계 각지로 쫓겨났다. 이는 모두 역사다. 상징이나 허구가 아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죄로 인하여 쫓겨나서 ‘성 밖으로 버려진 것이다.’ 저들은 개와 교접하고, 점술가들과 음행한다. 분노와 수치와 미움을 견디지 못해 살인하고 자기들 좋을 대로 우상을 숭배한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그 말을 지어내어 돈을 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현대 사람들은 점점 애완동물과의 친밀감을 사람과 사람 사이보다 낫게 여긴다. 장난처럼 모든 프로에서는 점술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상품화한다. 내남없이 분노조절장애를 앓는 듯 시비가 끊이지 않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증오하다 살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유기한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비싼 값을 치르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스펙과 이력서 한 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자격증으로 그를 판단한다. 저마다 성공을 위해 우상을 두고 롤모델로 삼아 숭배한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이다. '마술사 시몬'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다를까?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
오늘 본문은 이 시대의 표상을 마술사 시몬을 통해 들려준다.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하는 자이다. 능력에 함몰된 인물이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종교는 사는 데 위안을 삼는 정도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낙을 즐긴다. 어느 훗날 저들은 황당한 질문을 들을 것이다.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마 22:12).” 그때는 이미,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예수님은 경고하셨다.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9-10).”
스스로 꾸며 살아가는 방도를 재능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다양한 자신의 재능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마술 부리듯 돈을 버는 세상이다. 누구는 손재주가 좋고 누구는 언변이 뛰어나다. 누군 운동신경이 좋고 누군 머리가 명석하다. 저는 이미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고 자칭 큰 자다. 거기서 자부심을 느낀다. 사람들이 따르면 이윤이 창출된다. 캐릭터 사업이 그렇듯 대놓고 일인 방송을 하는 이유도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저를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하는 평가를 성공으로 우러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일컬어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다. 종교적으로 기괴한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서로가 옳다는 목소리뿐이다.
이에 모두 쫓겨나 생을 다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그래서 세상은 온통 주목 받는 생을 추구한다. 광고사가 흥행하고 이를 대행하고 기획하는 업종이 판친다. 이에 성경은 우리를 일깨우신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곧 그리스도 밖의 일에 있어서 너무 생을 허비할 뿐이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곧 우리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지 않다. 병들고 실패하고 낙오하는 일이 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는 극히 일부다.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곧 저 사탄은 항상 우리 곁에서 ‘광명의 천사’로 변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은 사탄이 주도한다.
타성에 젖은 죄악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그들이 따르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11-12).”
죄가 무서운 것은 언제부턴가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죄는 끔찍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구원은 누구나 그 어떤 자격으로 얻은 게 아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복음이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구원은 우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 이대로 안이하게 타성에 젖어 죄를 낙으로 삼고 행복을 추구한다면 더는 소망이 없다는 것.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부러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4-9).” 그러니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을 어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2-13).” 저들 앞에 서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요, 무력하고, 나태하며, 안이할 따름이다. 돈만 있으면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는 게 최고 같다. 그런데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4).”
곧 우리의 타성에 젖은 죄악을 일깨우기 위해 하나님은 아침마다 징벌을 준비하신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읽어보자.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 8:13-14).” 누가 옳은지 분간할 길이 없다. 가라지가 알곡과 같이 자란다. 이를 어찌 뽑아야 할까? 그러나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9-30).”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이다. 저마다 종교를 갖고 나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는 이 때에!
저들도 예수님을 믿는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로 오셨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지금은 하늘 보좌에 계심을 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도 믿는다. 그러면서 종교의 이익을 위해 섞어 넣는다. 각종 형상과 모양과 그림을 숭배한다. 마리아를 숭상하고 여러 성인들을 숭배한다. 성경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자기들의 말을 첨가한다. 그 삶의 모양과 성격이 모범적이기까지 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마술사 시몬’과 같은 교회들이 점점 그 체제를 굳건히 하고 있다. 그런 저들을 향해 예수님은 일갈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돈을 드려 이르되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8-19).”
얼마나 황당한 소원인가! 그런데 실제 우리 삶은 비일비재하다. 금식을 하고 헌금을 바치고 봉사를 자처하며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로 희생하여,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 한다. 그러나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이 모두는 가증할 뿐이다. 성경은 엄히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즉 오늘 우리의 열심이 얼마나 하나님을 비통하게 하는지 모른다. ‘마술사 시몬’의 소원이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하다. 이에 말씀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6-7).” 자기 능력으로 구원의 값을 치르려하는 어리석음은 예사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오늘 본문은 이른다.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무서워 떨 줄 알아야 한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3-5).” 곧 자기 스스로 이루려던 구원의 결과는 이와 같이 허망할 뿐이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나오는 말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1-23).”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 그의 성품을 나타내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사탄은 버젓이 이를 대적한다. 다들 그러고 산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시 78:36-37).” 이와 같이 우리의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저마다 헛것을 숭배하기 때문이다. 어느 훗날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럼 우리의 진정한 신앙은 무언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묵묵히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오늘 말씀은 덧붙인다. 우리가 아직 살아서 이 땅에 있는 이유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부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다른 길은 없다.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8: 26-40, 겔 36:31 / 스스로 밉게 보리라 (0) | 2019.08.22 |
---|---|
행 8:26, 겔 36:24-27 /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0) | 2019.08.09 |
행 8:1-6, 겔 15:2 / 하나님의 섭리 (0) | 2019.07.26 |
행 8:1-3, 고전 14:12 /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0) | 2019.07.19 |
사도행전 7:39-43, 렘 31:18 /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0) | 2019.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