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8 주 일
행 8:1-6, 겔 15:2
하나님의 섭리
사도행전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8: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에스겔
15: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들어가는 말
이파리는 나무를 위하고 열매는 남을 위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파리가 풍성한 나무가 되길 바라지 않으시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시다 열매는 없고 이파리만 무성하였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막 11:14). 에스겔은 이를,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겔 15:2).” 하고 묻는다. 우린 무서울 정도로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 이끌려서 산다. 이때 우리의 무지는 죄다. 무지(無知)는 ‘없을 무(無)’에 ‘알 지(知)’를 써서 ‘아는 게 없다’는 뜻이고, 그 밑에 날 일(日)자를 더하면 ‘슬기 지(智)’가 되어 알지 못하는 날들, 곧 지혜가 없음을 뜻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무지를 일깨운다. 그리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다.
마땅히 여기더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 바울 이전의 사울은 자신이 하는 일을 마땅히 여겼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8:1).” 그는 스데반이다. 교회는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부흥하고 있었다. 이에 구제와 헌신이 넘쳐 경건한 자들을 따로 불러 일곱 집사를 세웠다. 그 중 스데반이 설교를 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 이를 사울은 마땅히 여겼다. 저는 누구보다 열심이고 하나님을 잘 아는 바리새인이요 열심당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였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삶은 단순하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율법주의자였던 사울처럼. 그래서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왜 그럴까? 저들 속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는 ①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②어리석기 때문이다. 이는 ③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내버려두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그 행태가 오늘 날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롬 1:21-25).
더 무서운 일은 믿는다고 아는 사람들이다. 저들의 무지는 알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無智)다. 바울은 훗날 이를 통회하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저는 오늘 일도 숨기지 않았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행 22:20).” 이처럼 성경은 가감 없이 모든 사실을 서술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정의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우리의 앎은 영적인 분별력이다. 곧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
종종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일이? 하면서 당혹스러운 게 많다.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를 조롱하고 교회 안의 사람들을 이를 당혹스러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곧 지나가는 고난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그 어느 것도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모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다. 모두는 지나간다. 죽음으로 끝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지만 그 끝보다 더 두려운 영원이 그 너머에 있다. 곧 죽음 너머에도 고통은 있다. 영원한 형벌이다.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후 4:17).”
현재 우리의 고난은 복음을 이루는 것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곧 우리는 환난을 당하나 환난 가운데서 인격은 성장하고 주의 소망은 이루어진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러므로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과의 교제다. 이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당하셨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리고 우리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를 우리는 고난으로 배워 인내에 이르고, 인내를 통해 인격이 변화하며, 성장하는 인격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 이를 알면서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발적인 복음의 증인이 된다. 그러나 거짓도 있다. 그냥 평안하다, 괜찮다, 다 잘 될 거다 하면서 우리 영혼의 안이함을 부추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위하여 크게 울더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2).”
우리의 눈물은 기도다. 서러움의 표출이 아니다. 넋두리가 아니다. 푸념이 아니다. 신세한탄도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곧 우리의 눈물은 기도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어떻게 이를 알 수 있을까?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그러므로 우리의 눈물은 반드시 칭찬을 가져온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하나님의 섭리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3-6).”
앞서도 말했듯이 우린 종종 하나님의 뜻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암담한 현실이 찾아오면 우린 당혹스럽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그와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참 사랑과 자비를 배운다. 왜 꼭 그러셔야 할까?
하나님이 고약하신가?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7).” 다시 말해 우리의 굳은 이마 곧 생각과 우리의 마음 곧 생활이 틀어지고 망가져서 그렇다. 죄의 용서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허용하실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이 용서다. 결국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 죽으셔야만 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는 없다 해도 엄연한 사실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23:6).”
나오는 말
이에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시 31:24).” 곧 우리 안의 무지와 무지를 꺾으시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 우리의 고난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인생을 사느라 고단한 삶은 죄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설령 우리를 우리의 삶이 고달프게 한다 해도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무엇을 말인가? 오늘 본문은 복음의 역설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까지 이와 같은 주의 복음이 전파되어진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결코 우리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 택함과 은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다 하나 저들은 은혜를 받을 줄 몰랐다. 하나님도 엄격히 사람의 동의 없이 은혜를 주실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오늘에까지 참고 또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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