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전봉석 2019. 8. 3. 07:20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

삼상 28:3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편 145:18

 

 

사울만큼 경건을 도모하던 종교적인 사람이 또 있을까? 저는 사무엘이 죽자 나름 열심이었다.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면서 왜 본인은 주를 찾지 못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금세 또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삼상 28:7).” 자기의 수단을 동원하고 그 수고로 일을 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의 결점을 이렇게 대신 노래하는 것 같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145:9).” 즉 하나님께 아뢰고 주를 의지하기를 바랐으나 저는 직접 그러지를 못하였다. 누구를 통해 무엇을 가지고 어떤 수단에 의해 주의 뜻을 가늠할 뿐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우리의 아이러니함을 오늘 말씀은 되새기게 한다.

 

한다고 하고 나름 그 열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기는 하나, 하나님 아닌 모든 선은 악하다. 어제 묵상했던 말씀처럼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44:15).” 자기 하나님이 아닐 때 자꾸 남의 하나님을 빌어다 숭상하고 숭배하는 것 또한 우상이다. 며칠째 붙들고 있는 말씀 중에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36:22).”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요 우리가 더럽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함이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3).”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함을 증명하시기 위해, 한 사람의 죄인을 돌이켜 성도가 되게 하시기까지 입증하신다. 곧 내가 이처럼 주를 바라고 주께 의뢰하게 되기까지 하나님의 능력은 입증된다. 나의 장모가 그 집안이 주를 경외하는 자로 거듭나게 하시기까지 주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증거가 되게 하신다. 곧 오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증명한다. 나는 이와 같은 진술 앞에서 오금이 저린다. 지난날 내가 어떠하셨는가 하는 것으로는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숨길 수 없는 양심의 이야기다. 그런 나를 오늘 이처럼 주를 바라며 사모하는 자로 삼으신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이름을 위한 일의 증거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심을 입증하라면 나의 처가와 장모와 저들이 섬기던 우상숭배로부터의 돌이키심이 그 증거다. 그처럼 한 영혼을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145:8).”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자복하며 감사한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9).” 이를 살아서 삶 가운데 증거로 삼는 자의 구원이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십자가의 보혈은 단지 나를 지옥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다시 돌이켜 주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일에까지 이르게 하신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노년에 장모의 고통이 심하다. 다들 바빠서 저를 건사할 여력이 없다. 어찌할까 하는 것을 차라리 우리 집 곁의 병원으로 모시자고 제안했다. 차라리 입원을 시켜 집안일에서도 좀 놓여나게 해드리자는 거였다. 그 증상이 나와 비슷하여 나는 그 고통을 가늠하다 그러자고 한 것인데, 아내는 시름이 깊다. 모든 일을 작파하고 어머니를 모실 수도 없고, 형님댁은 더더욱 가게 일로 여념이 없으니. 아무래도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당장의 우려와 염려는 차치하고 하나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고 아내를 다독였다. 그러다보니 한 늙은 여종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이 곧 그의 거룩하심의 증명이라.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를 위한 게 아닌 주의 이름을 위한다.

 

탕자가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에서도 우리가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의 긍휼하심이다. 돌아오기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은혜와 저를 반가이 맞아 잔치를 베푸시기까지 하는 그의 자비하심 앞에서 우리는 잊고 있던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이 땅에서 한 생()의 원리였다. 누구나 당장의 일에 연연하여 도로 신접한 자를 끌어들여서라도 무슨 일이든 도모하려 드는 그 열심이, 수고가, 우리의 희생과 섬김도 모두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주를 의뢰한다는 일은 오직 주만을 바라며 섬기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이 전부가 아니면 그 작은 일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각설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9).” 곧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16).” 그러니 내 안에 이는 안달은, 우리 안에 이는 복달은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불신앙의 무게다. 아이는 결국 입원이 좀 더 연장될 것 같았다. 토요일에 외박을 하였다가 일요일 11시에 다시 병원으로 가 의사와 상담이 잡혔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의 말을 아이엄마에게 확인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더 다급하고 더 신중한 일을 좇는 것에 대하여 누가 뭐라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저마다 다들 자기 소신대로 산다. 안 믿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믿는 자들 역시 자기 믿음을 신봉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것을 뭐라 한들?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결코 상대적인 이해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일 테니. 그래도 주일 예배를 중심에 두고 모든 일을 분별하고 정돈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 듣고 삼켰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들 좋을 대로 하나님을 믿고 필요로 하고 찾고 갈구하는지 모른다. 정작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에 하나님이 따라오길 바란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결연한 바울 사도의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누구 뭐랄 거 없이 나 하나 바로 살자. 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힘에 겨울 따름인데, 주시는 바 맡기시는 데 따른 능력이면 족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오직 주만을!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나의 이와 같은 글쓰기가 묵상이 나로 하여금 온전히 주의 사랑을 붙들며 의지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를. 누구에게 보이고 어떤 평가를 받는 따위의 일로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만 바라기를. 구원이란 바로 이 온전한 변화가 그 증명이 되어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 이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로 더럽혀진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시는 그 증거로 삼으시는 것이다. 나는 노년에 육신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장모를 생각하며 또는 이제 스물셋 젊은 청년이 겪는 정신적 혼란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기복에 대해 생각하다 주께 아뢰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145:10).” 기어이 탕자는 모든 걸 다 잃고 돼지 먹이로 연명하다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정작 저에게 여전히 재물이 있었다면, 그토록 염원하던 능력과 권세가 있었다면 끝내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나는 오늘 내게 두시는 어려움을 통해 주를 더욱 바란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3).” 이제 나의 남은 생애로는 오직,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5).” 고로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권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6).” 그들이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7).” 그러므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