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6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0-11
같은 처지이면서 전혀 다른 느낌을 받는 데는 사람 참 별 수 없는 것 같다. 그러할 때 누구는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는 오히려 ‘그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입고 용기를 얻는다.’ 그 차이에 대하여 나는 어찌 설명할 길은 없고 다만 어떠하기를, 곧 그 말씀을 내게 보이시는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시 147:19).” 그러할 때 주의 인자함으로 우리는 기뻐한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 말씀을 되뇌며 되는 일들 가운데 주의 다스리심을 목격한다.
아무리 다급하다 하여도,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나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 말할 수 없어 두렵다. 그러므로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하는 말씀 앞에서 소망한다(삼상 30:6).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오늘 우리 생활에 드리우는 어떤 후환과 고초와 힘겨움 가운데서도 주만 바라고 말씀 붙들고 나아갈 수 있기를. 곧 ‘말의 힘이 세다 하여,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아니었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하시는 말씀 앞에 안도한다. 아이 하나는 병원 치료가 2주 더 연장이 되었고, 하나는 갑자기 가족들과 피서를 가야 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어머니 병문안을 가서 예배를 드렸다. 두시는 데서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더럽힌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주님이 아끼신다.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겔 36:21).” 하나님 없이 사는 삶에 대하여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이를 증명하신다. 곧 한 영혼을 돌이켜 주의 권속으로 삼으시는 데까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은 증거 된다. 나는 장모에게 이를 상기시켰다. 지난 날 우리의 삶이 어떠했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의 은혜가 또한 어떠했는가?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6-9).” 남은여생이 이제 그러한 축복을 누리기를.
오직 주만을 바라고 오직 주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것임을.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증거와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는 네 아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20-21).” 하면서 기꺼이 들려주고 증거할 수 있는 삶으로,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25).” 우리로 의롭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럴 자격이 없는 우리로 주의 앞에 서게 하시는 일이 주의 거룩이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시 147:20).”
이제 알겠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이 또 있겠나? 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나의 구원에 대하여, 나는 장모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그 놀라운 은총을 들려주면서 확신하였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한 게 아니다. 전혀 쓸모없는 우리를 이처럼 귀히 여기시고 돌이켜 주의 자녀로 삼아주신 데 대하여, 늙은 시므이의 고백에서도 나타난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29-30).”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름은 주의 구원을 보는 일이다. 이 구원은,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31-32).” 그와 같이 보이고 들리는 눈과 귀가 그 증명이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34).
저녁께 아이엄마와 카톡을 하여 아이의 경과를 물었다. 약물 투여를 최대한 낮추고 그리 적응시켜서 직장 생활도 무난할 수 있게 한다는 게 목표였다. 나는 그 모든 게 주의 인도하심이고 선하심인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 두시면 그 삶을, 저리 두시면 저 삶을, 그와 같이 우리는 묵묵히 생을 살아드리는 것으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세움을 우리는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시므온의 증거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34).” 이 일을 행하시는 이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다. 나의 조건, 우리의 어떤 노력이 담보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죄나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태와 상관없이 주의 은총이란 온전히 주의 권능이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심령이 가난’하여질 뿐이다. 주밖에 누굴 의지하고 누구에게 의뢰할 수 있겠나! 이를 알게 하시기까지 참고 또 기다리시는 것이 은혜다.
이미 죽었던 우리가 아닌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결코 이 구원은 우리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주의 온전하신 은혜다. 거룩하신 그의 이름의 영광이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36).” 부디 나의 남은 생은 그러하기를. 우리의 복음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할 수 있도록 붙드시고 인도하실 것임을.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이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3).” 곧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0) | 2019.08.07 |
---|---|
그를 찬양할지어다 (0) | 2019.08.06 |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0) | 2019.08.04 |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0) | 2019.08.03 |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0) | 2019.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