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삼하 8:6, 11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모님은 아침 일찍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퇴원을 하겠다고 하였다. 평소 그러시는 분이 아니라 아내는 화들짝 놀라 마음을 졸였다. 그러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그제서 나도 말하였다. 며칠째 알아보고 간신히 자리가 나서 들어가게 된 요양병원이었으나 모르면 모를까 이제는 아무리 그래도 그리로는 모시지 않겠다. 서글프고 어려운 시간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더니만 결국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하나님도 마음이 좋지 않으셨던 것이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나는 이 말씀이면 족하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나? 그러므로 “다윗 왕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나의 어줍은 마음까지도 주께 드린다(삼하 8:6).
전날에 입원을 했다가 다음 날 오전에 일찍 퇴원수속을 하려니까 다들 태도가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었다. 급한 대로 우리 집으로 모셨다. 생각보다 필요한 게 많았다. 휠체어며 좌변기, 보행기를 우선 구입하였다. 집안 형편이야 빤하지만 서로가 마음은 편했다. 장모는 어린아이처럼 안도하다 자장면이 드시고 싶다고 하였다. 참 신기한 일이다. 예전에도 그처럼 못 빠져나올 것처럼 굴던 누구 신주단지 모시는 우상 소굴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도 처음으로 자장면을 찾았었다. 어머니에게 자장면은 비로소 안도의 의미가 되는 음식이었다.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이다 오후 늦어서야 글방으로 올라갔다. 아이와 통화를 하고 아이엄마와 카톡을 하였다. 이번 주가 고비다. 약을 줄이고 아이는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였고 말은 횡설수설하였으며 장황하였다. 그럼에도 잘 견디면서 하려고 하는 의지나 노력이 가상하였다. 저들을 응원하고 소파에 누웠다가 녹다운이 되었다.
다들 고생이 많다. 누구 신랑은 수재라. 대기업에서 외국인 회사로 서로 스카우트되어 다니던 이가 언제부턴가 목 디스크로 꼼짝을 못한다. 그러니 누군 방학인 두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 회사까지 데려가 수고가 많았다. 다들 우환에 근심에 걱정에 삶이라는 게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다. 나는 그러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은 드러난다고 말해주었다. 아이엄마는 무슨 소릴 하는가하여 답이 없었다. 누구는 그냥 또 그러려니 하였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1:44).”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아내는 마치 이제야 기분이 좋아진 사람처럼 발랄하였다. 장모도 괜히 말씀만 그렇지 전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야말로 안방을 내주고 거실에서 자야 하지만 너무 좋았다.
그러니 신기할밖에. 다들 어뜩하냐며 혀를 끌끌 차는데 이상하게 우리는 기분이 좋았다. 아이엄마에게 이를 어찌 말로다 설명을 해줘야 할지 몰라,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근심의 자리에서 드러난다고 다시금 말해주었다. 너무 예민하게 굴 거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우리는 순결하지 못하다. 그런 우리로 씻겨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게 하려니까 생이 고달프고 일은 꼬이고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드디어 알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그러려니 그게 저절로 될 리 있나? 생이 고달프고 힘든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평안을 누린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16).”
새삼 느끼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은 어렵지 않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이를 말로다 설명할 길은 없다. 심지어 누군 위로하는 마음에선지 얼마를 부쳐 어머니 좋은 거 사드리라고 보내왔다. 또 의료기를 파는 가게 사장은 뭐가 딱하였는지 도합 136000원 하는 계산을 120000원에 해주었다. 저녁에 삼계탕을 사다가 드리는데 그 가격에 1+1이었다. 이를 일일이 설명하는 일이 유치할 정도이다. 되어지는 일에 대하여 ‘너희 마음의 쉼을 얻으리니’ 하실 때, 터진 일을 무마시켜주시거나 줄여주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집을 넓히고 방을 하나 더 생겨나게 하시는 것도 아니고, 병든 몸이 뚝딱 낫게 되는 것도 아니면서,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는 말씀이 일상에서 다만 증명이 된다.
유난을 떨며 이 일로 새벽기도를 간다며 수선을 떨지 않았고, 금식을 하고 특별헌금을 내고 뭔가 경건을 도모하느라 협상을 하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하지도 않았다.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저녁에 딸애가 퇴근하여 오고 같이 평소처럼 가정예배를 드리면서도 오히려 무슨 명절날 분위기처럼 서로들 낄낄거렸다. 우리가 이상한 건지,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나는 다만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하는 오늘 말씀에서 크게 공감한다. 그럴 때면 ‘그것도 여호와께 드리되’ 때론 나의 불평과 원망도, 마음의 근심과 어려움도 숨길 게 없다. 그럼 어쩌겠나? 누가 알아준들? 나는 그 의미 없고 덧없음에 더는 혹시나 하지 않는다. 유난을 떨 일도 없다. 그리 주어진 날이었다. 이런 말은 좀 거짓말 같지만 아침에만 해도 허리가 아파서 나야말로 물리치료를 받으러가든지 병원에서 진통제라도 맞아야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처럼 거뜬한 날도 없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주 쉽고 가볍다.
무슨 엄청난 기적이 아니고 신비도 아니다. 내가 그리 마음먹어서 그러는 무슨 고급스러운 경건도 아니다. 나도 모르는 힘이다. 뚝딱, 일을 해결하였고 모든 게 순탄하였다. 저절로 그리 되는 것을 느꼈다. 나의 하찮은 하루가 온통 그 증거다. 기진하여 소파에 누웠을 때 깜빡 졸았던 그 평안을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오후께 내가 아이 일로 상심이 크고 예민한 아이엄마에게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신다고 말해준 건 목사니까 괜한 권면이 아니다. 주인 사장이 그 둘째 아이가 욕실에서 넘어져 유리가 그 위로 쏟아지고, 정말이지 큰 일 날 뻔했던 사건을 겪었다. 나는 그게 주의 경고라, 하고 말해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저이는 자꾸 기도만 해달란다. 대수롭지 않은 듯 마치 자신에게는 그런 일쯤 별 것 아니라는 듯 툭툭 털어버리니까 나는 그저 허허롭게 웃었다. 겁이 없다.
겁이 없으면 은혜도 모른다.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도 모른다. 여기서 겁은 경외다. 그저 근심하고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따위의 감정이 아니다. 경고음을 듣는 것이다. 큰 일 날 뻔했어! 하고 안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 안다. 그럴 때 우리의 장점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 6:9).” 이보다 더 확실한 전가가 어디 있겠나?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시라. 그럴 땐 그러려니 하고 저럴 땐 저러려니 하면 된다. 그때마다 부르르 떨며 안달복달 야단을 떨어봐야, 그래서 나아진 게 있나? 새삼 금식을 하고 경건을 도모하며 거래를 하듯 희생을 내세운들? 모르겠다, 나는. 나는 그저 주어진 대로, 주시는 대로 사는 것뿐이다. 이번엔 다리가 아프면 다리가 아픈 것이고. 허리가 아프면 허리가 아픈 것이고, 장모가 그러하여 집으로 오게 되었으면 또 그냥 그리 된 것뿐이다. 어쩌겠나? 아프니까 악, 소리 내고, 힘드니까 짜증도 나고, 누굴 부러워하든 서러워하든 그건 다 자기 몫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걸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어쩌라고?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그런 줄 알았더니 하나도 안 받아주셨다? 그럼 또 그럼 또 그러시는 것이고! 중요한 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이다. 저는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되는 일도 없고 하는 일마다 힘에 겨워 버벅거리기 일쑤지만, 그게 또 나인 것을 주님이 왜 모르실까? 그때마다 나의 완고한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5-27).” 이보다 더 좋은 게 또 있겠나?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 남의 날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하는 나에게 맡기신 나의 날이다. 오늘은 어깨가 아프다. 아놔! 그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3:12).”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어찌 아픈 게 주의 손길이겠나! 아픈 건 아픈 거다. 힘들면 힘든 거다. 그러나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 곧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나도 거룩하게 하시려고, 두시는 어려움과 숱한 우여곡절이 실은 그리 무겁지가 않았다. 그 안에서 쉼이 있었다. 기어이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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