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없다. 인간에 의해 증명된 하나님이면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범주 안에서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다. 성경은 계시 언어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그 말씀으로만이 하나님을 헤아려 알 수 있을 뿐이다. 가령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하는 고백은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만 가능하다. 그 증거이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곧 전에는 괜찮았던 것인데 이제는 혐오한다. 스스로 미워한다. 이는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26).” 즉 우리가 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의 변화된 모습으로 가능하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2.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아니, 이미 충분히 나타내 보이신다. 가령 한 부자가 죽어서 말하였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눅 16:27).” 이는 저들로는 자기와 같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하지만 부자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30).” 이에 아브라함이 답하였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 즉 신이 신을 똑똑히 드러내어 보여도 보지 않는 자는 볼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받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을 우상화하여 숭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상이란 자신의 목적에 따른 수단으로써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잠 2:4).”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이미 우리 일상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우리가 무엇인데 하나님을 보이라 마라 할 수 있나?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한데 스스로 알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여 천사장은 사탄이 되었고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가인은 기어이 동생 아벨을 죽였고, 가룟인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3.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아는 범주 이상의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성경은 이를 엄격히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한데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답을 원한다? 즉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는 말씀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증거를 요구한다면, 말씀보다 자신의 이해와 판단을 우위에 두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가늠한다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과 기준과 그 이해가 최소한 이 자연의 순리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가? 하다못해 자신이 자신의 마음조차 증명하며 살 수 있는가?
4.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창조와 조성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창조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말 그대로 무엇, 유(有)를 만드신 것이고, 조성이라 하면 그 있는 것으로 더욱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굳이 ‘진화’라고 한다면 그 표현의 정도는 어느 정도 인정한다. 가령 ‘야곱’은 훗날에 ‘이스라엘’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나아가 ‘여수룬’이라 불렸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 즉 우리는 이를 성화라 한다. 로마서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증거한다. 어떤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그런데 늘 그와 같은 원함은 있으나 행함이 없는 우리 자신을 통회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이를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이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그래서 우리는 애통한다. 심령은 점점 가난해진다.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의 말씀이 이를 증거하신다.
5.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다시 말하지만 ‘진화’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성장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마지못해 그와 같은 표현을 수긍한다. 그러나 사람이 침팬지였다는 생물학적인 진화는 가당치 않다. 사람은 창조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곧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 몸의 비율이나 외모의 특성이 달랐다는 것을 일컬어 진화를 운운하는 일은 어불성설이다.
6.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로봇 다리, 로봇 팔, 심지어 로봇의 뇌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래 맞다. 무병장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수한다 한들 영원할 수는 없다. 또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영혼은 만들 수 없다. 사람은 몸과 정신(감정)과 영혼을 가졌다. 또는 다른 시각에서 몸과 영을 가졌다. 육은 흙으로 돌아가도 영은 그럴 수 없다. “모든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리라(욥 4:15).” 이는 죄의 결과다.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4).” 그러나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20-21).” 이는 죽기 전에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 기술이 발달하여 무병장수하든, 심지어 천년만년을 살든, 모든 생명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경우는 과학의 발달과 무관하다. 인간이 미개하여 신이 존재하였고, 이성적으로 발전하여 신이 허구였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어쩌면 과학의 발달로 리모컨이 또는 그 어떤 원격조정 장치가 샤머니즘적인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7.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본래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살기를 원하시지 않았다. 이는 엄연한 죄의 결과다. 그럼 어째서 죄를 미연에 막지 못하셨는가? 하는 질문이 따를 텐데, 과연 그런 존재라면 그게 어디 인격적인 존재이겠나? 하나님은 결코 사탄의 거역을 막지 않으셨다. 아담의 불순종을 억지하지 않으셨다. 다만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택은 저들 몫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죄와 질병과 고통을 지으시지 않았다. 다만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가령 그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흠 하나 티 하나 없는 무오염의 로봇 같은 인간을 만드는 게 더 쉬운 일이 아니셨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같은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자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이를 원하셨다. 이에 고통과 불행은 전적으로 사람의 죄의 결과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러므로 하나님이 결코 하실 수 없는 것은 용서였다. 우리의 죄를 그냥 없었던 것으로 하실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육신이 되어 우리의 죄를 직접 담당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8.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악인을 만드신 적 없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 죄의 속성은 전가되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그럼 저들을 왜 묵인하신 것인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즉 우리는 자신이 죄인인 것과 하나님의 속량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인 것을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신다.
9.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원죄와 자범죄로 나뉜다.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원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두 씻음을 받았다(받을 수 있다!). 이를 알 때 스스로 죄를 거듭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 참된 성도의 자라감이다. 곧 속죄함 말고는 답이 없다. 속죄함을 얻고 끝일 수 없다. 변화되어 새 사람을 입고 그대로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워한다. 스스로를 밉게 여긴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이를 아는 것이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싸운다. 싸우면 싸울수록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해 하며, 온유한 자로 나아가는 것이다(마 5:3-12, 참고).
10.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내버려두지 않고 강제한다면 그게 어디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라 할 수 있겠나? 이미 모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그렇다고 하나님이 임의로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신다면? 과연 스스로 그런 존재이길 원하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도록 오래 참으시고 또 인내하시며 기다리신다.
11.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성경은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한 국가의 역사와 개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서술하였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과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 단지 어떤 교훈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어 우리의 이해와 상식을 더하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12.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이를 요한 사도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2-3).” 이를 우리는 성경이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는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이를 그저 개인적인 만족이나 광신적인 이유라고 한다면 굳이 이와 같은 질문과 답변도 무의미해진다. 정말 뭔가 갈급하여 이와 같이 질문하는 것이라면,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될 것이다.
13.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종교란 신을 찾아가는 사람의 신앙이다. 신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갈급함이 목적이다. 이에 그 신은 수단일 뿐이다. 가령 아이의 병듦을 가지고, 또는 생의 어떤 허기짐을 느끼고 신을 찾는 것이라면 나무도 돌도 자연도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와 상관없는 이루어진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다른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니 심지어 우리의 신이 우리를 빌어먹게 하고 죽인다 해도 우리는 주 앞에 아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14. 영혼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할 수 있는 그의 생기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혼 또는 정신으로 혼용하여 표현하는데 다소 무리가 있지만 같은 맥락이다. 아무리 무신론자라 해도, 모든 생명은 신을 안다. 저마다 자신 밖의 ‘어떤 힘’, ‘절대자’ 앞에 빌고 또 바란다. 곧 우리의 영혼은 저마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안다. 다만 이를 부정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뿐이다. 그러는 것이 영혼의 증거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15.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우리는 천주교를 믿는 게 아니다. 또한 기독교가 교회를 믿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 이를 말씀하시는 성경을 믿는다. 성경은 무오하다. 한데 저들은 성경 외의 다른 성경을 가미한다. 어떤 형상과 모양과 그림을 숭배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속자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진리를 가미한다. 마리아나 성인을 숭배한다. 그리스도 예수 한 분으로는 모자란 모양이다. 심지어 신부나 목사의 권위를 높여 저들의 무오함을 강조한다. 교회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둔다. 이는 모두 우상이다.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보태거나 빼면 이는 다 미신이다. 천주교를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교회를 다니면? 천국에 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천국에 가기 위해 믿는 게 아니다. 천국에 갈 자이기 때문에 믿는다. 아니, 믿어진다. 저절로 믿는다. 그래서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16.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착하고 성실하고 의롭고 선함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살인한 자나 미워한 자나, 간음한 자나 음욕을 품은 자나 그 죄는 같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그러니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나? 그래서 우리는 절규하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15:31).”
17.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두려워할 줄 아는 유무에 따라 가늠할 수 있다. 천국에 갈 자는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안다. 하지만 지옥에 갈 자들은 굳이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우리는 성경을 믿는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30).” 믿음은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18.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시편 73편을 보자. 우리는 종종 저들을 부러워한다. 나름 착하고 성실하게 믿음 생활하고 신앙을 지키며 산다고 하는데,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낙심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1-3).” 저들은 자고로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4-9).” 즉 이 땅의 삶으로 전부라면 저들이 옳다. 부러울 따름이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고 사는 게 가장 바람직한 것 같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우리는 다만 하나님으로 사는 게 복인 것을 안다. 곧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19.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성경의 언어는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이를 읽고 이해할 때는 동일하게 성령의 감동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우리가 시를 읽거나 누구의 글을 읽을 때도 사전적인 의미, 지시적인 의미, 함축적인 의미를 모두 고려하여 그 단어의 뜻을 살펴야 한다. 왜 예수님은 부자라 지칭하셨을까? 한 부자 청년이 하루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왔다. 저는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준행하였다고 자부했다. 예수님도 이를 반문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저는 순간 어려워졌다. 나름 한다고 한 것이 모두 자기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22).”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자’란 자신이 의존하는 무엇이 많다는 것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자신의 지식이든 심지어 선행이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23).” 스스로 이루어 천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다.
20.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교회 숫자와 교인 숫자 따위는 상관없다. 99%가 믿는 그 믿음이 헛된 것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판단하지 않는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우리는 저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어떤 권능을 신봉하는 것도 아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2-23).” 자기 좋을 대로의 믿음으로는 99.99% 선하고, 의롭고, 모범국이 되어 범죄가 없다 해도 성경의 구원과는 무관하다.
21.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이는 참 어리석은 질문이다. 가령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그 사람이 즐겨 쓰는 말로 판단할 수 있다. 무슨 생각으로 늘 가득 차 있고,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엇에 열심인가 하는 것을 보면 대략 그 사람의 정도가 나타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이 이를 수단으로 여겨 말투며 행동이며 생각조차 의도적이라면 이는 모두 광신자다. 광신적인 삶은 모두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일상을 산다. 주와 함께 산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현실의 모든 배후에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안다. 이를 믿고 신뢰한다. 우리의 구호나 삶이 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22.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폴란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과 등.
-성경의 공동체주의는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그 목적이 가르침과 교제와 기도에 힘쓰기 위한 것이다. 이를 사람 중심으로 당을 만들고 당의 이익과 목적으로 혼용한 것이 공산주의다. 저들은 공동이익, 공동분배를 주창하지만 엄연히 사람 중심의 모든 모임은 이에 다를 바 없다. 저들 나라들이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지식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오늘 날 교회 중심도 자칫 공산주의처럼 당회나 사람들의 권리와 주장을 중심으로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하다. 교회는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졌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러므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하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베드로를 수장으로 하는 그 권위를 교황, 신부로 편중하여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23.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앞서 했던 대답이 되풀이 되는 것 같아 지루하다. 교회가 많고 신자가 많다고 범죄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또한 범죄율이 적다고 하여 모범적인 지상의 낙원을 꿈꾸는 것도 옳지 않다. 교회나 우리의 신앙이 이 땅의 질서와 공공의 유익을 위한 목적을 띄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 믿는 자의 삶은 선한 양심으로 드러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하지만 그런 우리의 선행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5-17).” 다만 하나님 앞에서 말함이다.
24.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아주 그릇된 교리다. 성경에 위배된다. 사탄의 가장 훌륭한 걸작이다. 하나님 앞에 무오한 사람은 없다. 저의 결정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나아가 다윗은 다윗일 뿐이다. 베드로도 베드로일 뿐이다. 우리는 저들을 믿고 섬기는 게 아니다. 교황의 결정에 잘못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로마 가톨릭이 비성경적인 반기독교임을 시인하는 꼴이다.
25.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온다. 먼저는 성경이 이를 기록하였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그 때와 시는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신다. 전천년설이니 후천년설이니 하는 것도 설왕설래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갑론을박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반드시 도래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4-8).” 분명한 것은 그 종말을 시초부터 알리셨다는 것이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곧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덧붙임
이와 같은 질문에 시달리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왜냐하면 저는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 위해 숱한 질문을 갖게 하고, 괜한 일에 참견하게 하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을 품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경계한다. 정작 저들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논쟁을 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더할 뿐이다. 이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도 증명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은 우리가 취한 게 아니다. 그리 더하신 주의 은혜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괜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 것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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