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삼하 10:1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이를 바랄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즉 어떠하든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누가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어느 질문지에 ‘개신교 목사로서’ 기꺼이 답을 해주었다. 그러느라 나는 종일 교회에 있었고, 글방에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가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경을 그 중심에 두고 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애매할 게 없다. 단호하고 단순할 뿐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리 말해주었다. 오늘 처한 이 모든 현실도 그러하다.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다. 어떠하든, 이를 붙들고 바랄뿐이다.
생각은 명료하고 삶은 단순하였다. 힘들면 힘든 거지 힘든 걸 안 힘든 것처럼 굴 것도 없고, 다만 그 가운데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곧 오늘의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거침이 없게 하심인데, 오늘 본문은 이에 담대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주어진 한 날의 삶에서 나의 날들이 더욱 단순하고 담백하기를 기도한다. 너무 생각이 많다. 유혹하는 것들도 많다. 한데 이는 우리 마음의 일이지, 세상은 본래 그러했다. 마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곧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그러니 이를 어쩔 것인가? 나는 누가 어떤 질문지를 주며 답을 부탁하였을 때 그저 마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생각을 적고 그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가면서 나의 확고한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들 그 마음에 따라 산다. ‘길가 밭’ 같거나 ‘돌짝 밭’ 같으면 영락없다. 이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성경은 엄연하였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다른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 이야기도 아니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이다. 은혜는 그때마다 필요하다. 묵은 것으로 사는 게 아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서 어느 한 시점으로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받게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저는 나에게 나는 저에게 소요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는 이처럼 아침마다 묵상을 글로 쓰는 일을 사랑한다. 또한 누구와 어떤 일로 말하거나 생각할 때 성경을 떠올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귀히 여긴다.
다 저녁께 손위처남이 조카와 함께 어머니를 뵈러 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 두서없는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중심은 보인다. 하다못해 그 사람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영적인 상태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다. 일상은 그저 스쳐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남없이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것이 모여 대해(大海)를 이루듯 이는 곧 교회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각각 그 개개의 생이 모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었다. 서로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한데 모여 주를 바라며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는 왁자지껄 오가는 말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기도하며 아뢸 수 있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의 증거다.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안에 소망을 두신 이유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누구의 부탁으로 여러 질문에 답을 하다 나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나에게 향하신 주의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다. 전에 같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화두다. 또는 나의 완고함으로 더없이 덧대어 답 없는 답을 끊임없이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덧붙여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질문에 시달리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왜냐하면 저는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 위해 숱한 질문을 갖게 하고, 괜한 일에 참견하게 하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을 품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경계한다. 정작 저들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논쟁을 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더할 뿐이다. 이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도 증명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은 우리가 취한 게 아니다. 그리 더하신 주의 은혜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괜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 것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된다.’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답이 되는 답이 있다.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셨다. 저는 진리를 앞에 두고, 이미 다 알면서도, 실은 굳이 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도 아닌 거였다. 우린 이와 같이 헛된 질문들 앞에서 얼마나 자주 시달리곤 하는지. 남이 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 되풀이하는 질문도 그저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다. 본래 질문이란 몰라서 하는 것이기 보다 동조를 구하는 것이다. 원하는 답은 이미 손에 쥐고 그 답에 합하면 동의하고 부합하면 적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지적인 허영이 또는 갈급한 호기심이 실은 그리 선하지 못하다. 종종 누가 와서 퉁명스럽게 묻는다. 교회 세습에 대해 목사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동성애에 대해, 이혼에 대해, 돈이 많은 부자로 사는 것에 대해 목사님 생각은 무엇입니까? 할 때 저들은 이미 자기 할 말을 입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뭐라 한들! 그저 좋으실 대로 하시라.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조금은 새삼스러웠고 새로웠다. 나의 확고함이 두려우면서도 감사하였다. 구구절절 이어지던 말을 덜어내고 성경의 근거를 놓지 않았다. 형님과 어머니가, 아내와 형님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신비하였다. 종종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지’ 하는 말끝마다 나는 아찔하였다. 그처럼 예전의 내 모습을 스스로 미워할 수 있는 게 또한 복이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이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32).” 이 모든 게 날 위한 게 아니라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데 나는 이제 안도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조금은 의아한 게 전에 같으면 반감이 들 말씀인데 이제는 그 중심을 붙들게 하는 것이었으니, 스스로 이와 같은 변화를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은혜이었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다 또 어떤 이를 그리워하다 그만둔다. 나는 저의 어느 한 지점으로 족하다. 다만 우리의 훗날에 주 앞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고작 그런 정도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문득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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