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삼하 12:15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편 10:12
‘하나님이 모르시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다 그리 된 일은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모든 상황은 덤덤해진다. 곧 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 앞에서 죄악 된 모습까지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를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오늘 말씀은 잔혹하면서도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한다. 하나님의 냉정하심은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을 위한 것이다. 가령 의사가 냉정을 잃고 환자를 불쌍히만 여긴다면 모르핀이면 족하다. 진통제로 충분한 것이다. 환부를 도려내고 썩은 것을 잘라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삼하 12:15).”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 그냥 살다 마는 세월이라면 굳이 노여워할 일도 응징할 것도 없다.
그때 우리는 아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시 10:1-2).” 말씀이 말씀으로 이어지는 데 놀란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17).”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다. 그 영혼이다. 주의 영을 우리 마음에 두시기 위함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그러기까지 아이는 죽고 아이는 또 낳는다. 밤은 오고 아침을 맞는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8).” 구원의 완성은 진행 중이다.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같이 살다보니 장모의 고집이 아내의 것이었고 그 가족 구성원들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왜 저럴까? 싶으면 그 뒤에는 오래 전부터 그리 되어진 유전인자가 있었던 것이다. 아이의 오늘은 어른의 어제 때문이고, 어릴 적에 닫힌 문은 이내 견고하게 벽이 되었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두고 하나님은 그저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시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시다. 진통제나 주고 안정제나 먹임으로 오늘을 무마하려 하지 않으신다. 돌아보면 나의 날들이 그러하였고 오늘의 날들은 다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유난히 혼자 생각이 많은 날이었다. 아내는 친정에 청소하러 가고 딸애가 집에서 늙으신 외조모를 봉양하였다. 그 사이에서 하는 것도 없이 바쁜 일과였다.
문득 드는 생각이 그저 막연한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은 있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과는 무관할 수 있다. 아담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알았고 대화까지 나누며 교제하였으나 그의 결말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거였다. 곧 나의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의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을 수 있다. 보편적인 신으로서의 하나님으로는 곤란하다.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고백과 그와 같은 믿음으로는 어림없다. 인격적이고 즉각적인 관계가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죄와 씨름해야 하는지, 오늘 다윗의 행적은 묵상할수록 그 의미가 난해해진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싶던 전 장에서의 난장(亂場)이 오늘 나단의 방문으로 일거에 무너지는 것을 본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할 때에 저는,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3).” 하고 즉각적으로 실토하였다. 어쩌면 죄와 용서는 지난한 세월로 그 결과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4).” 그저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없다. 하나님은 모르는 일이 없으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안정이 된다. 심지어 나의 모든 죄와 허물과 사악함까지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주어지고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쏟아진다 해도 그 목적은 엄연히 살리시고자 하는 일이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겔 36:25).”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결코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모두가 나를 떠나고 심지어는 부모도 나를 버린다 해도,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2).” 하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갈망으로 비롯된다. 그러므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4).” 내 삶에 기근을 두시는 데는 다 그만한 목적이 있었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8).” 곧 우리의 회복은 단순히 고통을 덜어주시는 일과는 다르다.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 답답하고 숨을 쉬기 어려웠다. 전에도 그랬지만, 장모가 오고 난 뒤 나는 나로 볶이는 것이다. 불안증이란 게 괜한 것이겠나? 다 알면서도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 고통이라. 항시 어떤 두려움이 엄습한다. 피하고 외면할 수 없으니 직면하고 마주하며 가는 길이기는 한데 그러자니 말해봐야 소용없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4).” 그러기까지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이라.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하다못해 주사를 한 대 맞는 데도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정작 두려운 일은,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호 4:17).” 그게 무엇인지 안다. 주의 버려두심이 그 어떤 저주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가령 조카아이는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 사원이 되었다. 고급 승용차를 가지고 다니며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 점주들을 관리한다. 속된 말로 뽀대 난다. 그런데 저의 속엔 원망과 서러움뿐이라. 자기 인생이 다 아버지 때문에 그 모양이 됐다며 늙으신 조모를 대할 때도 망나니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시키는 대로 다하며 살았더니, 그래서 자기 생이 이 모영 이 꼴로 고달프고 힘들기만 하다는 것이다. 종종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섬뜩하다. 그러한 원망을 저 아이만 품고 살아왔겠나? ‘내버려두라.’ 하나님이 그리하실 때 우리는 죽을 맛이다. 사는 게 지옥 같다. 남들 보기엔 훌륭하게 잘 자랐고 좋은 직장에 연봉 빵빵하겠다, 남부러울 게 없는 것 같지만 그의 영혼은 메말라가는 것이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
그러한 삶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더 방황하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나 역시 꽤 먼 길을 그리 돌아왔던 것이었으니, 주의 긍휼하심은 엄연하고 냉혹한 손길이 따를 것이다. 이는 그의 완고함과 비례한다. 천하의 다윗도 그 행적을 살펴볼 때 저가 저절로 다윗이 된 게 아니다. 이를 하나님이 강제하신 것도 아니다. 다 저 좋아서 한 짓이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그러한 우리를 주님은 안타까워하신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오늘에 이르러 내가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송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 10:17).” 그러므로 주 앞에 겸손하자. 나의 죄악을 인정하자.
나는 누구보다 교만하였다.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6).” 그러나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12).” 오직 주만 의뢰한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주가 다 아신다는 데 비로소 안도하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16).”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7-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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