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삼하 14:28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7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시 12:8).” 하는 말씀에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 비열함에는 책임전가나 회피도 있다. 묵인과 암묵이 있다. 은폐와 감언이설도 있다. 모두는 수치심에서 비롯되었다. 죄는 우리로 부끄럽게 한다. 이를 거하여 주께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아무나에게 열리지 않았다. 사람은 스스로 나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숨었고 이를 숨기다 쫓겨났다. 저들로 다시는 나아오지 못하게 하셨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그로부터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았다. 비열함이란, ‘성품은 천하고 어리석으며 하는 짓이 너절하다.’ 그러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뛴다. 서로가 부추겨 길길이 날뛴다.
왜 다윗은 애당초 암논을 벌하지 않았을까?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범하였을 때 응당한 징계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저의 묵인과 회피로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도망쳐 그술에 머물렀다. 다윗은 아들을 그리워하였고 요압은 이를 보고 꾀를 내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이때도 왜 다윗은 저를 외면하였던 것일까?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23-24).” 상응하는 훈계와 응당의 꾸짖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28).” 그러니 서로 그 속이 어떠했겠나? 그러는 동안 반목과 오해와 미움만 싸여갔을 터. 결국 또 요압이 나서서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33).”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더욱이 가족이란 그 관계가 오묘하고 복잡하여, 불가근불가원이라. 가까이 하기도 멀리하기도 그저 복잡다단할 따름이다. 보면 그 성품이 뒤틀려서 비열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그 가족사는 꼬여있다. 뒤엉겨 그 처지가 서로들 딱할 뿐이다. 누구 탓이 아니라 내남없다. 애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여지없다. 가령 중2 아이가 너무 막나간다. 머리를 사내 녀석처럼 깡똥하게 자르고 말투나 걸음걸이가 건들건들하여 왜 저런가 하고 눈여겨보았더니, 그 속은 더하였다. 우울감에 시달리고 조울증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부모는 이혼인지 별거인지 알 수 없고, 엄마의 잦은 잔소리와 참견이 거의 또 병적이라. 수업 중에도 뭐가 뒤틀리면 아이를 당장 오라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괜한 걸음걸이는 없다. 본래 그런 말투도 없다. 다 뭔가 뒤틀리고 와해된 구석이 있는 법이다.
이를 ‘경작하라.’ 성경은 일찍이 이를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이는 삶의 터전이며 서로의 관계이고 자신의 마음이면서 가족 간의 의무다. 그리하여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 12:11).” 맡기신 바, 인생의 이유이다. 이내 이 모든 것 또한 주가 하신다.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겔 36:34).” 실제 이 말씀을 마음 밭으로 두고 생각하여도 그 의미는 같다. 그러자니 오죽할까? 경작하는 이나 경작당하는 땅이나 그 과정은 지난하고 모질어서 후벼내고 파내어 갈아엎고 온갖 돌을 떠내야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수고가 온전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비열해진다. 비열의 특징은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자신만 개의치 않는다. 무감각하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당사자만 모르는 게 죄다. 그저 너 때문이다.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할꼬?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마음에 찔려 우리는 절규하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괴로움에 주께 나아올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의 고난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8-9).”
말씀을 따라 음미하다보면 고개를 들 수 없다. 마음은 사무치고 부끄러움만 인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게 얼마나 피폐하고 황폐하며 거칠고 딱딱한지! ‘그 황폐한 땅이 경작될지라!’ 영락없다. 아이를 둘러싼 부모가 그 가족들이 황무지 같기만 하였다. 이를 복원하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복음밖에는 답이 없다. 그런데 어찌 들려줄 기회가 없다. 뭐라 한들 반응이 없다. 저들도 저들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는 병들고 부부는 갈라서고 형제와는 반목이 이뤄지고, 그러니 오로지 돈뿐이다. 개처럼 벌어 개처럼 쓴다. 나는 누구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둔다. 어느 아이를 떠올리다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고 만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었음에 대하여,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다들 저마다 제 고집대로 살뿐이다. 어쩌겠나? 이를 보고 느끼고 깨달음으로 주의 도우심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퇴원을 앞두고 아이가 글을 썼다. 내용이 좋았다. 이를 읽어보라고 누구에게 주었다. 뭐가 좋은가? 하고 되물었다. 아이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저는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옆 사무실 누가 건너와 너스레를 떨 듯 말을 겅중거리다 갔다. 온통 가벼움이어서 노년에 악기를 연주하고, 댄스를 배우고, 산악회에 따라다니면서 인생을 즐긴다. 그것이 즐거우신가? 나는 되묻지 않았으나 뭐라 한들! 저에게 하나님이란 그저 좋은 것, 어떤 종교적 의미의 하나로 그만이다.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그만이고, 그게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개의치 않고, 자신이 신이다. 자신을 위해 살 뿐이다. 누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하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러하다. 도무지 나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천하의 다윗도 다를 게 없다. 그런 그가 기도한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시 12:1).”
우리는 모두 그러하다. 말씀 앞에 앉을 뿐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그리하여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나는 사방을 보며 사람들을 대하며 다만 주의 말씀 앞에 고개를 조아릴 따름이다. 어쩔 것인가? 아이는 아이의 길이 있고 저 노인은 노인의 길을 따를 뿐이니, 나는 이런저런 일을 보며 주의 살아계심만을 의뢰한다. 이내 주가 보전하신다. 지키시고 다스리신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아무리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아무리 세상이 요지경이라 해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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