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전봉석 2019. 8. 19. 07:04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1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사람이 참 추하고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삼하 13:14).” 저의 추악한 행실을 보고 우리도 부끄럽다.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15).” 그 마음이 고작 그 정도인 것을 그저 사랑이려니 하는 것으로 안달을 부렸다.그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 때문에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되니라(2).” 또한 이런 사태를 두고 오늘 다윗의 뭉그적거리는 태도가 더욱 큰 화를 자초하였다.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21).” 왜 저는 다른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무마하고 덮어 그러려니 여겼던 것일까?

 

훗날에 그래서 다윗은 이와 같이 표현한 것 같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1:3).” 하는 말씀을 읽다 전날에 들은 장모의 지난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랬었지.’ 하는 옛날이야기는 모두에게 구구하고 절절한 법이다. 일찍 여윈 장인의 매정하고 냉혹하였던 성질과 이에 억눌려 살았던 손위처남의 학창시절 이야기. 아내와 텀을 두고 세 아들을 잃은 장모의 사무치는 마음과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시집살이에 대하여. 첫 손자 녀석이 고스란히 조부의 성질을 물려받아서 지랄을 떨 때면 사무치는 마음이 되살아나고. 이를 전해들은 손위처남은 자신이 겪었던 부친에 대한 모진 성질에도 그러그러한 자식의 행태에 대해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그렇듯 우리의 죄는 세월을 따라 악순환이 되어 가는가. 아내와 장모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은 식탁머리에서 듣고 웃어넘기기에는 참으로 사무치고 모진 세월이었다. 아니, 왜 그럴 때 형님은 가만히 있어? 나의 의아한 질문은 그저 우문이었다.

 

우리에게 은혜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속상한 것이다. 지난날에 대한 스스로 미워함이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36:31).” 이는 성경의 여러 증언으로도 종합할 수 있다. 우선은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 하나님과 논쟁하였던 욥의 경우에도 스스로 옳다고 여겼던 일에 대하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 우리는 회개뿐이다. 다윗은 고백하였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딸애가 장모의 이야기 중에 사촌 아이의 성질머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쑥 하였던 말이, 우린 그럼 다리몽둥이가 부러져 맞아 죽었을 거예요! 하면서 왜 그런 경우를 보고도 그냥 있는지에 대해 반문하였다. 온전한 사랑은 그저 막연하게 두둔하고 모르는 체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우리의 상한 심령이 주께 나아가는 구심이 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돌아보면 우리의 모진 세월은 그 값의 원인이 있었다. 결과는 이내 돌이켜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간구하는 일이다. 그저 송구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5:8).”

 

그저 들으며 누구 이야기려니 하기에는 내 안에 부끄러움이 늘 주께 아뢰어진다. 그리하여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15:2).” 주 앞에 당당히 설 자 누구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내가 나로 나를 이겨낼 수 있는 재간이 없다. 형님도 그 자식의 일을 어찌 건사할까? 저 자신인들 그러고 싶어 그렇겠나? 여기저기 치이다 늙으신 모친과 조모의 마뜩찮은 행실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겠으니, 나가서야 그러겠어? 하는 말에 나야말로 한숨이 턱까지 찼다. 새는 바가지가 여기서 새고 저기서는 괜찮겠나? 우리의 죄의 일이라. 다윗은 심중에 그저 노하여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의 우유부단함이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줄 누가 알았겠나? 급기야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죽여 그 분풀이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나는 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내 타락을 정당화하고 분풀이하는 마음을 이끌어간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1-23).” 누구라고 예외이겠나? 스스로 선하다 하는 이가 죄가 크다.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도처에 악이 도사리고 그때마다 끌려 다니게 되는지 모른다. 솔직히 나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지난날이 부끄러워 할 말이 없었다. 딸애는 곁에서 슬쩍슬쩍 건들 듯, 우리 아빠 같았으면 반 죽여 놨을 텐데! 하며 키득거렸다.

 

별 수 없다.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몫이다. 이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는 사랑이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마치 내가 저보다 나아서 자식을 잘 양육하고 바르게 키운 줄 알면 오산이다. 모두가 주의 은혜다. 1%도 나의 공로는 없다. 오히려 나의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가족들의 마음이다. 한 집에서 그 가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어느 훗날에 서서히 자녀들의 삶으로 드러난다. 돌아보면 정말이지 나야말로 너무 했다 싶을 정도로 부끄러움뿐이지만, 나를 꿇려 주 앞에 읍소하게 하시고 이를 고스란히 아이들 앞에 감추지 않은 것이 은혜였다.

 

보면 스스로 강함을 깨고 부러져 누구보다 고개를 숙이는 게 산 교훈이 된다. 주 앞에 엎드리는 것보다 나은 가정교육은 없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로 주와 같이 거룩하게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과 모든 피조물을 그대로 보존하시면서 오늘에도 이 모든 것이 합력하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통치하신다. 그리하여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오직 주만이 나의 주가 되신다. 그리하여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6:15-16).”

 

다들 이런저런 사정과 형편에 어쩔 수 없는 날들이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겠으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8-30).” 결국은 다 하나님의 섭리다. 그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 다만 나는 주를 신뢰하며 나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주께서 덮어주심을. 그리하여 온 우주는 하나님의 아들되는 우리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그의 목표인 것을. 그러므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20).”

 

마음의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주 앞에 내어놓으며,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1:1).” 다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4).” 그리하여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