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1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2-3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와 다윗을 저주하며 오는 저의 친족 시므이와 기어이 아비에게서 왕좌를 찬탈한 압살롬과 그에게 더러운 계략을 내는 아히도벨과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 다윗의 위대한 신앙이 돋보는 한 대목이다. 쫓겨 도망가는 신세에도 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뢰한다. 내 아무리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내가 무엇인데, 그리 아니할 수 있을까?
나에게 희망이 없고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를 의뢰할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럴 수 있는 것은 용기도 무모함도 아닌 믿음이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뢰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그는 ‘시작이 없는 존재이시니 끝이 없다. 절대적이며 독립적이시고 모든 의지로써 무엇도 비교할 수 없다. 변함이 없으시고 진리와 선함, 아름다움의 표준이시다. 언제나 옳고 가장 귀한 존재이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
그러므로 하나님께 취하여진 나는 존귀하다. 나의 한 날이 복되다. 어떠하든지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롯이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여야 한다. 존 파이퍼의 <하나님께 놀라다>(예수전도단)를 읽고, 아이들이 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알았다. 이 모든 일들이 그 자체로 장엄하였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1-3).” 가령 대통령 취임 축하쇼에 전투기가 굉음을 내고 날며 군악대가 연주되고 도열한 백성들이 열렬히 외쳐 환영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높이 들린 보좌는 하나님의 권위다. 저는 전능하시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그는 결국 자기 뜻대로 행하신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이를 누가 대적하여 그 뜻을 거스를까? 오늘 다윗은 이를 엄연히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삼하 16:10).”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되어지는 일이 때론 너무 고단하다. 어렵다. 받아들이기 괴롭다. 아이는 복지관에서도 더는 받아주지 않아 다른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 아이엄마는 허탈한 심정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누군 그런 아이를 위로하고 같이 식사하고 응원하기 위해 군포에서 일부러 왔다. 아이는 기분이 좋아 말이 많아 들떴다. 횡설수설 요란하였고 즐거움에 낄낄거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고, 새삼 일러주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임으로 주의 찬란한 빛과 전능하심 앞에 경배하였다. ‘그의 옷자락은 성전 가득하였다.’ 주의 빛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까? 심해 깊은 바다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각각의 자기발광체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은 코에서 어느 것은 지느러미, 이마, 눈 밑, 등껍질에서 빛을 발하며 어두운 심해를 누빈다는 것이다. 화면에 비친 다큐멘터리를 보며 황홀하였다.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빛이랴! 아이의 이런저런 현실과 이를 건사해야 하는 엄마와 그 본인의 버거운 삶의 짐과 자기 안에 두시는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찾아와 위로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아이와 그 장소와 고요가 정지된 화면처럼 한참을 나의 망막에 머무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는 이 거룩에 대하여 어찌 표현할 길이 없다. 존 파이퍼 목사는 그 어원이 ‘자르다’, ‘분리하다’에 있지 않을까? 아마도 그리 추측하였다. 오후 네 시께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소파에 널브러져 뒤틀린 허리를 폈다. 통증은 시원함으로 가시고 깜빡 잠이 들었다. 어느새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요지경인 사회에서도 묵묵히 주를 신뢰하며 산다는 일은 추상이 아니라 엄연한 실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1).” 내가 행하여 무엇을 얻었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이제는 ‘스스로 밉게 보인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오직 성령의 열매만이 천상의 결실이 될 것이다. 생명과 사랑의 발현이다(고전 13장). 그런 우리에게는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 92:14).” 오직 주만 바람이다. 이는 단시일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저절로 뚝딱,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무던히 또한 묵묵히 자라가는 것뿐이다.
주가 이루신다. 주가 행하심이다. 주의 절대 주권을 우리는 신뢰할 따름이다. 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능치 못함이 없다. 아이들과 성경공부를 할까 하다 족하여서 그냥 두었다. 둘이 마주앉아 공부를 하였고 나는 뒤편에 앉아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러는 동안 글방의 느낌이 달랐다. 성전의 공기가 달랐다. 어느 훗날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우리를 이끌어 들이심을 고대한다. 오직 그 길은 은혜뿐이었다.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겔 36:36).”
더는 용서도 이해도 긍휼도 없을 것 같은 저이 마음을 주께서 개간하여서 아이로 인해 그 남편의 잘못을 또는 아내의 거친 혈기를 서로가 용납하고 화해할 수 있기를. 아이의 존재는 엄연히 하나님의 선으로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인데, 나는 늘 마음에 두고 아이엄마를 위해 기도한다. 아이들과 점심을 같이 먹다가 믿지 않는 가정에서 홀로 믿음을 지켜가는 아이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주를 영접하시면 너희 온 가정이 구원에 이를 것인데! 그러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어림없는 소리라는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불가능할 것 같으냐? 하고 물으니 선뜻 네, 하고 대답하였다. 들은 바로 그 아버지의 고집과 자기 아집이 보통이 아니라. 나는 풋, 하고 웃으며 우리 장모와 그 형님이 예수를 믿고 오늘에 이르러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그 증거다!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다. 종종 나는 장모가 아멘, 하고 화답할 때마다 놀란다.
누가 어찌 인위적으로 저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을까? 이내 자신의 지난날을 부끄러워하며 그 비열하였던 모습을 스스로 미워하게 될 것이다. 더는 죽어도 그리 살 수 없다고,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리 되기까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우리는 거저 된 것 같으나 그 구원의 값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의 사랑의 엄청난 값이다. 이로써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니 결코 오늘 우리의 어려움이나 추함이나 힘에 겨운 날들이 헛되거나 그저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다윗은 알고 있었다. 저가 붙든 믿음을 하나님은 선으로 여기셨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삼하 16:12).” 저는 다만 묵묵히 처한 상황을 헤쳐가고 있었다. 어떠하든지 말이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13).” 곧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시 14:1, 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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