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삼하 15:1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누구를 의지하며 무엇을 따를 것인지, 오늘 말씀은 새삼 주목하게 한다. 일련의 상황들을 묵상하다보면 인생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로서는 말씀을 접하는 일이라 앞뒤 내용을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당사자로서 저들 무리에 섰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보면 다들 자기 생각이 있다. 뭐라 해도 그 고집대로 산다. 가끔 볼 때는 참 순하다고 여겼던 이가 가까이 접하면서 그토록 고집불통일 때가 없다. 하긴 그 사람 속을 누가 알겠나? 난들 누구에게 다를까? 그런 거 보면 다 저마다 그저 생긴 대로 사는 모양이다. 요즘 내가 아주 득도를 한다. 출근 준비를 하던 딸애가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도로 누웠다. 장모는 일찍 서둘러 서울 다니던 병원으로 의사소견서를 받으러 가야 했다. 아내는 어머니를 모시고 나는 딸애를 데리고 각각 병원으로 갔다. 무슨 바이러스 때문인가, 몸살기 때문인가? 딸애는 다행히 빈혈은 없고 백혈구 수치가 높게 나왔다. 처방을 받아 아침을 먹여 회사로 보냈다.
국밥 국물과 반찬을 사서 장모를 모시고 갔던 조카아이와 함께 점심으로 먹었다. 조카아이는 서둘러 학교로 가고 아내는 수업 준비를 하고 나는 글방으로 나갔다. 정신이 쏙 빠진 듯 분주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의 고질적인 불안은 숨통을 조이는 듯하였고 그때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진하여 좀 누워있자니 아이가 퇴원을 해서 집에 혼자 있었다. 그런 걸 그냥 두기 뭐해서 글방으로 오라 하여서 일기를 쓰게 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복지관에서도 아이를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더는 갈 데가 없었다. 어쩌겠나? 하는 데까지 해보자. 아이엄마는 미안해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할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더도 덜도 아니다. 그리 말해주었다. 나에게 들려주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누구를 바랄 것인가?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새삼스럽다.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이라.” 행여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묵묵히 주어진 일을 준행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고집과 아집에 매여 사는 꼴도 허다하다. 그러는 와중에 누가 벨을 누르고 ‘유월절’ 어쩌고 하며 포교를 하였다. 참 다들 억척스럽게 산다. 산다고 사는데 그 삶이 참으로 고단할 뿐이라. 나는 어쩔 것인가?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내가 내 스스로 열심을 다하면 그 의견을 굽히지 않는 법이다. 자기주장이 곧 무기인 셈이다. 대표적으로 욥이 그러하였다. 친구들과 논쟁할 때 저는 절대 굽히지 않았다. 자신이 옳다고 여겼다. 그런 그가 주를 대면하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결국은 주 앞에 서야 하는 일이다. 사람에게 보인들, 저들로부터 인정받고 내 주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펼친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나름은 열심이더니, 그 삶이 자랑뿐이었는데, 주께만 서면 악을 행하였을 뿐이다. 말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가령 시편 73편에서 얼마나 세상을 부러워하고 죄인들의 순탄하고 복된 삶을 칭송하였던가? 그런데 그게 다 주 앞에 서기 전까지다.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그저 나는 짐승 같을 뿐이라!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그럼에도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이와 같은 고백이 귀하다(22-23).
저녁에 딸애가 퇴근하여 오고 같이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면 하루가 길고도 짧다. 나름 할 말이 많던 사람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송구하고 부끄럽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이처럼 말씀 앞에 앉으면 전날에 가졌던 내 주장과 생각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새삼 드러나는 아내의 극성과 장모의 똥고집과 좁아터진 집구석에서의 아등바등 견뎌내야 하는 일이 고단하기만 하다가도, 그러면서 내가 옳다고 여기던 것들로부터 한방 맞는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나 것도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다.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는, 나의 앎과 나의 수고와 나의 애씀과 나의 노력은 모두 허망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15:21).” 어제는 몹시 분주하기도 하였고 힘에 부치게 부지런을 떨기도 하였다. 하다못해 누가 숨넘어가듯 기침만 해도 가슴이 조여 오고 어떤 두려움이 엄습하는 처지인데, 하물며 거동도 못하는 장모와 같이 살게 되면서 나는 순간마다 쫄려서 못살겠다. 그러다 저 본인의 기구하였던 생이 안쓰럽고 아내의 수고가 안쓰럽고 이도저도 못해 마음만 졸이는 형님이나 형님댁도 안 됐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6).”
이런저런 일련의 상황이 그러므로 나에게 맡기신 일이라. 내게 두시는 형편이고 사정이라. 그렇다면 능력 주실 것이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없을 땐 또한 피할 길을 주실 것이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아이엄마가 자꾸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것을 그리 말해주었던 것도 말씀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없으면 또한 내게 놓아두시지도 않을 것이다. 이놈의 연약한 육신도, 나의 처지도, 일련의 엎친 데 덮치는 상황들도 모두 주께서 다스리신다는 데 안도한다. 그럼 됐지, 뭘 더? 할 수 있을 만큼 할 뿐이고 분수 이상의 것은 감당하지도 않게 하신다. 이를 감당하게 하심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고, 그 가운데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려 하심이다. 나는 그리 확신하였다.
지난 날 나의 열심과 수고가 오늘에 이러는 스스로 밉게 보일 뿐이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알고 보니 이것이 은혜였다. 그저 수고하고 애써 내가 할 만큼 했노라, 스스로 자부할 때는 그저 논쟁뿐이었다. 누가 뭐라 하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당장이라도 싸울 판이었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어쩌라고? 하면서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때는 그저 그런 내가 옳다고 여겼다. 잘하고 있다고 알았다. 그리 자부하였고, 그리 동조하는 이들과 친밀하였다. 그런데 저들 무리는 그저 아무 것도 모르고 같이 따르는 자들이었다. 이제와 보니 밀려다니는 안개 같은 존재였다. 있을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좋아라하다,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갔는지 알다다도 모를 겨와 같은 사람들이다.
본문에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하면서도 주의 뜻을 살피고 그 의중을 헤아려 지혜로 삼는 다윗의 기지는 놀랍다. 누구는 남기고 누구는 다음을 기약하면서, 하나님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임을 확신하는 저의 저의가 근사하게 여겨진다. 비록 그 신세는 초라하기 그지없으나 저는 다만 주를 신뢰함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이와 같은 아룀이 그 근간에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 주를 의뢰함이었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4).” 주께 아뢰고 고하는, 늘 주를 대면하고 사는 자의 기개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나에게도 그와 같은 자세와 용기와 굳은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
결국은 이로써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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