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 18:33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뒤늦은 후회가 갖는 교훈은 크다. 누구의 것이든 메시지를 띈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하고 우는 다윗의 애끓는 울부짖음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듯하다. 아차, 하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오기 전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말씀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 앞에 서는 일이 복되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이를 묵상하며 주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였다. 온 우주 만물은 주를 찬송하게 하셨다. 곧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다.
그런데 왜 세상은 점점 이 모양일까? 왜 죄악에 빠지게 하셨나?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에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안에서 찬송하게 하시려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자신의 아들의 죽음으로써 그 죄를 사하시는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다시 말해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심으로’ 도무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나로서 주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곧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은 비로소 우리가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다. 그러기까지 아들의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찬송이란 그처럼 못 견디고 자랑하고 권하고 그 가운데 충만한 것이다. 가령 누가 연애를 하면 자꾸 묻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 말을 한다. 그리고 참여를 이끈다. 어때? 괜찮지? 하면서 함께 그 즐거움에 이르게 한다. 하다못해 물건이나 어떤 영양제에 대해서도 그리 자랑하고 권하고 선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찬송이란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다. 예수의 구원을 향한 죽으심을 통해 만방에 전파한다. 이에 대해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그 하나님의 질투에 실망하였다. 우리에게 너무 사랑과 충성을 요구하는 신이라며 떠났다. 배우 브래드 피트는 하나님은 자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강요한다며 신앙을 버렸다. C. S. 루이스도 젊은 날 하나님을 ‘칭찬을 바라는 허영심 많은 신’이라 여겼다. <미국인의 복음>의 저자 에릭 거스는 ‘부모 자식간의 사랑보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우선하는 이기적이고 병적인 하나님의 요구’를 운운하며 복음을 떠났다. 런던 파이내셔널타임즈의 칼럼리스트 마이클 프로스는 ‘자신만으로 가득한 독재자가 아첨을 바라는 것도 모자라 강요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 저들의 이유를 메모하다 젊은 날 나의 이유와 중첩되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는 게 뭘까? 내가 내 안에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럼 나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일치한다. 곧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옳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오늘 나를 여기에 두신 이유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때는 내가 아직 주를 멀리하고 있을 때였다.
심지어 주를 떠나 세상으로 즐거워할 때에 누구를 이끌어 기어이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던 때에도 몰랐다. 그저 어느 부자의 허영심이 나 같은 비천한 자를 도움으로써 자기만족을 이루려는가, 하는 속셈으로 저가 학비를 대는 동안 마지못해 편입을 하고 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6-18).” 단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평안을 전하시고 성령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으로’까지 나를 오늘에 두신 것이다. 아이가 글을 쓰고 나는 앉아 존 파이퍼의 <하나님께 놀라다>를 읽으며 감격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시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를 영원토록 만족시키는 것이다.’ 저의 말에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가령 딸애가 쓰는 핸드폰이 몇 번째 기종인데 다음의 어떤 기종에 어떤 기능이 있다는 소리를 자랑한다.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 찬송이란 저절로 자꾸 자랑하게 되는 일이다. 입만 열면 아이 이야기를 하는 부모나 누군 다단계를 하면서 또는 보험을 하면서 어떤 제품을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다.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효능에 대해 또는 성능에 대해 자부하는 것이다. 어디 여행을 다녀오고 그곳에서의 좋은 인상을 누구에게 자랑한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권한다. 나중에라도 같이 가고 싶어 한다. 그 상대가 가깝고 소중할수록 그리 간절함은 더 커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는 게 그저 관념적인 의식이나 추상적인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그의 안에서 나의 만족도 최고가 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단지 아이가 안 됐고 불쌍해서, 또는 내가 목사여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돌보고 함께 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저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내가 알 수 없는 내 안의 확신이 나로 하여금 저 아이에게 애정을 갖게 하였다. 아이가 쓴 글을 같이 읽고 또는 저의 횡설수설 무슨 말에든 대꾸를 하고 들어주는 일에서 종종 싫증이 나고 황당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것까지도! 장모가 집에 와 같이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나는 안정제가 늘고 가슴을 졸이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 역시도, 주가 얼마나 사랑하시면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이와 같은 시간을 보내게 하시는가, 하는 생각! 친구 동생이 위암으로 죽어갈 때 그의 병상에서 같이 에베소서를 읽고 묵상하던 50일간의 아침마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던 일이다. 이내 '당신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고 있다'는 고백을 하였을 정도로. 저이의 임종을 보고 나는 기어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성적으로는 어찌 설명이 안 되는, 어떤 충만함이었다.
그 충만한 기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시려고(시 16:11),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아, 그래서 이를 알면 알수록 다른 모든 것은 해로 여겨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는 것이었구나!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7-9).” 어쩌면 잠깐씩 맛보는 지금 이 기쁨과 충만함을, 이를 영원히 누리게 하시려고 오늘의 나를 예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나로 삼으셨구나! 아이가 돌아가고 청소를 하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주어진 날을 묵묵히 주의 이름으로 만족하는 삶이 가장 복되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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