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2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전날의 어려움이 주일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두시는 게 아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위하신다. 지조 있게 온전히 주만 바라기를, 바로 알고 확실한 데 거하기를. 아이들과 남아 성경공부를 하며 그리 당부하였다. 유혹이 너무 많은 시대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호 4:12).” 워낙에 미신이 판치고 우상이 늘어 그것이 그저 일상이 된 세상이지만 그때마다 유행처럼 드러나는,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는 법이다.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일어나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그와 같은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보면(삼하 20:1), 자신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그때마다 쓸려 다니는 안개 같다.
말씀으로 붙들리자. 나의 당부는 누구를 향한 것이기 보다 날 위한 외침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내 안에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 나로 인해 찬송을 받으신다.’ 존 파이퍼의 글에 밑줄을 긋고 오래 되새겼다. 어떠하든 그 형편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다행이라 여겨 안도하며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기를.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이것으로 족한 것이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니(빌 1:20-23), 지금의 이런저런 형편과 사정과 이유와 어떤 변명들까지도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어서(3:8),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단지 믿는 삶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보물을 찾은 삶이다. 엄연히 다른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결코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다. 그 가치를 안다. 우리가 진리를 알되 이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믿음의 싸움은 필연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하나님의 자녀로 이는 우리의 권세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결국 악에 대항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생수의 근원을 곁에 두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일이라니!
이제는 그 어리석었던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 36:7).” 이는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8).” 결국 우리의 천국이란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이었다. 다른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인의 복음>을 지은 에릭 거스라는 이가 복음을 버린 이유는 ‘부모자식간의 사랑보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더 우선하는 이기적인 하나님의 병적인 요구’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긴 내가 아는 누구는 사랑하는 자식들과 같이 갈 수 없다면 자신은 천국에 갈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결국 복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이해와 주장을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뭐라 설명하다 나 역시 그런 논리를 가지고 살았던 것을 떠올렸다. 왜 저들은 다윗을 등지고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랐을까?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꼴이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시 7:15).”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이 그래서 다행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뭘 좀 할 수 있는 능력이 될 때 헛된 의지도 싹튼다. 오히려 환난과 시련 가운데 넘치는 기쁨이 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결국 사역의 의미는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1:24).” 저들의 그런저런 주장과 모습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이를 주장하여 다스리려는 게 아니라 기쁨을 도우려는 일이다. 참 감사가 그 안에 있다. 다들 돌아가고 아이들과 남아 성경공부를 하면서 오히려 마음은 편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이유는 어쨌든 그것이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명령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아이에게서 배운다. 그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게 아니다. 당장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해! 원대한 꿈을 꾸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한 걸음부터이다. 아이는 종종 뭘 하면 좋을까요? 하는 질문으로 나를 당황하게 한다. 그런데 그 묻기를 내가 주께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 확실한 비결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어떤 이유나 조건에 의한 반사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이것은 믿음의 본질이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게 그러니까 어찌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게 또 된다! 나는 이를 설교에 담고 싶었고 알려주고 싶었는데 모르겠다. 각자의 관심이 서로 다른 데 있어서 그러한가, 오히려 나는 아이들과 성경공부로 남아서 같이 하는 시간이 더 즐거웠다.
세상의 이런저런 악의 모양에서 우리는 또한 교훈을 얻는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2-13).” 다시 말해 악이란 하나님을 곁에 두고 다른 하나님을 찾는 형국이다. 뭔가 대단히 반역을 하고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저지르는 일로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주님은 끊임없이 자기부정에 대해 요구하신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오늘 다윗의 기도는 이를 바르게 할 수 있게 한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고로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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