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전봉석 2019. 8. 25. 07:00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삼하 19:2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시편 17:7

 

 

어려움과 고통이 연속이다. 사느라 드는 비용이 줄지 않는 것처럼 고통은 나아지지 않는다. 나의 고질적인 불안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겉으로는 태연하나 속으로는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노인과 함께 생활한다는 게 불편함보다 불안이 늘 엄습하는 일어서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그만일 것에 그럴 수 없는 나는 점점 더 예민해지면서 고통으로 느낀다. 저녁이 다 되어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주섬주섬 옷을 차려 입고 교회로 나갔다. 혼자 글방에 있으려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속이 편해지고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그러니 참, 이 일을 어쩐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그대로 놔두시는 것일까? 뚝딱, 사라지고 또는 거뜬히 없는 일로도 하실 수 있는데 왜 늘 번번이 어려움에 처하게 하시는 것일까? 거짓말처럼 그에 따른 답을 찾아보았다.

 

첫째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말씀 앞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둘째,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2:11).” 그저 광물과 같이 아무런 변화도 없는 영혼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더 큰 소망을 가지게 하시려고 그런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거짓말처럼 힘들어 죽을 것 같아서 도망치듯 글방으로 올라가 궁싯거리듯 평안을 찾고 말씀을 뒤적거릴 때의 답이었다. 그리고 넷째, 하나님의 지극히 큰 영광을 이루려고 하신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결국은 다섯째,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거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3).”


말씀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다 보니 어느새 아홉 시가 되었다. ‘여기가 좋사오니하면서 그냥 거기 머물고 현실로 내려오기 싫었다. 집에 오니 다들 그제야 저녁 식사를 끝내고 장모를 씻기고 어쩌느라 여전히 수선을 떨고 있었다. 마치 도로아미타불처럼 나는 도로 마음이 어려워져 끙, 하고 돌아누웠다. 누구에게 말을 한다고 알아줄 일도 아니어서! 그런 거 보면 우리 몸은 영원한 속량을 바라며 아우성이다. 육신의 고통은 이를 소리쳐 알게 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8:22-23).” 그저 안 믿는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다. 성령을 받는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피조물로의 숙명이다. 육신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사탄은 공격한다.

 

여전히 마귀에게 눌린 육신의 일이라!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10:38).” 신체적, 정신적 상처나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것이 이 땅에 권세 잡은 자의 세상에서의 일이다. 그러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고통의 대명사인 욥기서의 기록이 있다. 즉 하나님은 이 또한 주관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12).”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2:6-7).” 즉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바 없으시다. 이는 매우 든든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훗날에 욥은 고백하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요셉의 증언으로도 아름답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오늘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상황과 어려움과 그에 따른 남모를 신음까지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이를 반드시 선으로 갚으실 것이다. 다만 그러는 동안 이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로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하심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사람들과 헤롯과 빌라도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기어이 죽였으나 하나님은 기어이 이를 선으로 돌려서 구원의 보증으로 삼으신 것처럼 말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4:27-28).”

 

이 모든 게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임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내몰리면서, 오히려 이와 같은 현실이 더욱 주를 바라고 말씀을 의지하게 하시는 데 놀랐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바르게 알아가는 중이다. 모든 것을 바꾸시고, 세우시고, 다스리시며, 새롭게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2:21).” 성경은 이를 엄연히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4:17).” 우리로 이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이런저런 상황에 처해 옴짝달싹도 못하면서 이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며 주님만이 나의 주가 되심을 찬송하게 하심으로 영광되다. ‘영광되다함을 알게 하시려고 이 모든 것을 누가 창조하였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 같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40:26).” 심지어 나의 고통까지도 주가 치리하시고 간섭하시는 일이었으니. 아무 것도 의미 없는 일은 없었다. 내게 두시는 고통으로 나는 더욱 주를 실감한다. 간절함으로, 그러니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4:39).” 내 안에 요동치는 바람을 꾸짖으신다.


다윗의 생을 돌아보며, 저에게 끊이지 않았던 고통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것이 되레 저의 굳건한 힘이고 그 아름다운 시편의 고백이 되었구나, 생각한다.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삼하 19:2).” 슬픔은 우리가 죄악된 가운데서 이 땅을 사는 데 따른 최소한의 소요경비 같다.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여전히 죄의 몸을 입고 사는 일이라면, 사는 데 드는 비용을 어쩔 것인가?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17:7).” 오늘 나에게 절박함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을까? 가장 현명한 것은 주께 피하는 것이다. 이를 주께서 영광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 모두는 하나님을 의탁할지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누군들 어쩔 것인가?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구는 더욱 완고하여지나 우리는 도리어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