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삼하 23:2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다들 가시나무 같아서 내가 저를 잡으면 찔려서 잡을 수가 없는 줄 알았다. 어떠한가 하여 아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답이 없었다. 답이 없는 그 심정을 헤아리기까지 나는 혼자 마음이 어려워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으면 실은 가시나무가 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퉈 시시비비를 가리고 싸울 일이 아니다. 왜 이삭은 번번이 우물 때문에 시비가 붙을 때마다 가만히 피했는지 알겠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오늘 이 말씀을 한참 동안 입안에 머금고 그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회개 없이 그리스도 곁에 있을 수 없다. ‘회개는 나중에 해도 된다는 말은 틀리다.’ 그리스도 곁에 선다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오전에 일찍 노인요양수급자 가족세미나에 갔다. 다들 낯빛이 어둡고 창백하게 느껴졌다. 그리 여겨서 그런가했더니 내 표정이 그러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보면 가장 볼 수 없는 게 자기 얼굴이라! 늘 남 탓을 하다보면 그게 나인 것이다. 회개는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서 비로소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표정을 보고 놀란다. 지나온 날들을 혐오한다. 말씀 앞에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비로소 부끄럽고 송구하여 얼굴을 들 수 없게 된다. ‘회개’란 말이 ‘다시 생각한다.’는 의미다. 괜찮은 줄 알았고 심지어는 옳은 줄 알았던 것에 대하여, 자기의 민낯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일은 빛 앞에 감추인 게 없다는 소리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매우 두렵고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부끄럽고 민망하여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로이드 존스 목사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주된 목적’이라고 하였다. 밑줄을 긋고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진리는 구호가 아니라 삶이다. 막연한 가르침이 아니라 지지고 볶는 하루의 현장이다. 온통 악다구니 쓰며 살아가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더하시는 평화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그리하여 사는 게 얼마나 치열하면서 치졸한가.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누구의 어떤 말에 또는 저의 무슨 일에서 나는 저를 가시나무 같아 따갑게 찔려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실은 내가 나를, 저를 찌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삼하 23:6).”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 줄 아는 게 복이었다. 그게 나였구나, 하고 돌아볼 수 있는 게 회개였다. 내가 그리스도 앞에 섰다는 증거였다. 빛이 나를 비추심으로 내 안의 거짓과 허물이 드러나는 것이다. 누가 누구더라 뭐라 할 수 있겠나?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설교 본문을 잡고 오래 궁굴리며 되새겼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일,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4-35).”
내가 주 앞에 설 때 하나님은 나를 보지 않으시고 내 안의 하나님의 영을 보신다. 오늘 다윗의 고백이 그런 말 아닐까?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감히 내게 어떤 능력이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그 능력으로 사로잡힌바 되었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찬미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구나.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내가 찬송하는 게 아니라 ‘주의 능력으로’ 나로 하여금 그럴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하시고 전혀 다른 나로 세우신 데 따른 결과이면서 시작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 아니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설까?
지하주차장에서 같은 층의 젊은 목사 내외를 만났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해서 나도 모르게 언제 차 한 잔 하러 오시라, 어깨를 토닥이고 돌아섰다. 다들 피로한 날들이라. 이쪽이든 저쪽이든 세상에 사는 일이란 고단한 것이다. 그러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데 하물며 누구더러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겠나? 목사는 목사여서 피곤하고 성도는 성도여서 피곤하고 불신자는 불신앙이어서 피곤하고, 그게 구분이 아니라 우리 안의 회개가 그 증거다. 직분이나 역할이나 처한 상황이 말해주는 게 아니었다. 회개란 더는 죄의 굴레에 놓여있지 않다는 증거다. 이를 구술하고 주 앞에 아뢰어 죄의 부당함을 호소한다. 나는 왜 종종 누구의 열심이 가련하게 여겨질까?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시간 남짓 설명을 듣고 노인요양수급증을 받아들고 돌아갈 때의 그 고단한 발걸음을 떠올린다. 강사의 말마따나 ‘누구나 언젠가 노인이 되고, 노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마땅히 주변으로부터 돌봄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다만 그 고단함에 대하여는 국가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나름 그것은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일이다.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나,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그러니 어쩐다? 나의 요즘 입버릇 같은 생각은 느닷없고 난데없어 사람들을 보다 나를 봐도 다를 게 없다. 그러니 그럴수록 주를 의지할 수밖에.
아이엄마와 카톡을 하고 나면 열에 아홉은 늘 마음이 어려운 까닭은 저 혼자 짊어지고 가는 데 따른 안타까움이면서 어쩔 수 없는 죄의 본성이라!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는 것이 구원이란 결국 죄로부터의 해방인데 살아서 사는 날 동안 제 짐이라 여겨 제가 지고 가겠다는 것이 죄였으니, 아!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하나님을 곁에 두고도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는 것이었으니, 내 새끼고, 내 일이고, 내 부모고, 내가 처한 일이라 하여 스스로 바동거리는 꼬락서니가 죄였다. 나는 여태 그것이 자립심이라고 배웠다. 스스로도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이 옳다고 지향하였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아쉬운 소리 않고, 당당히! 그런데 내 곁에 장모와 아이가 있음으로 나의 하루는 교훈이 크다. 나 역시 실은 그동안 누군가의 배려와 도움으로 여태껏 살아왔던 것이고 보면,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일은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닌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다시 한 번 되새기지만 내 의지로 하는 찬송이 아니었다. 주의 능력으로 그리할 수 있는 은혜와 긍휼하심이 항상 있었다. 다만 이를 알지 못하고 외면하고 한사코 부인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오늘의 내가 얼마나 값지고 감사한가? 보조기를 벗고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연습을 한다. 늙음도 연습이 필요하고 회개도 그 과정이 필요하다. 비로소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의 오래 참고 기다리심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돌아보면 온통 주의 긍휼하심뿐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고로 나는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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