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전봉석 2019. 8. 28. 06:56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삼하 22:29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 20:4

 

 

병원에 가면 의사나 환자나 모두가 피곤하다. 환자는 의사의 말 한 마디에 희망을 갖기도 하고 절망을 갖기도 한다. 접수를 받고 전산을 하는 아가씨가 유난히 형식적이어서, 전날에 나 역시 마음이 상했다. 그런데 아침에 장모를 모시고 갔다가 한참 기다리며 저를 관찰하니 그럴만하였다. 사람들이 온통 피곤하다. 다들 짜증에 절었다. 같은 말도 퉁명스럽게 하고 자기 할 말만 하였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전날에 가졌던 불쾌함은 미안함이 되었다. 잘해줘, 아빠 딸이 늘 그런 사람들한테 시달리는 일을 해. 것도 나는 대부분이 목사님들이라는 사람들이야! 저녁에 딸애의 말이 마음을 후볐다. 장모는 무슨 30만 원짜리 주사를 맞고 날아갈 듯 통증이 사라졌다며 신기해하였다. 엉치뼈는 그만하면 붙었을 것이고 근력운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요양등급이 나와 서류처리를 하느라 부산했다. 하루가 금세 갔다.

 

그때마다 주께서 필요를 공급하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그저 다만 힘닿는 데까지 할 따름이다. 없는 듯 있고 못할 듯 다 한다. 아이가 먼저와 글을 쓰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쓴 글을 저장하지 않아 몇 줄 못 건지고 다 날렸다. 쓸 때마다 본인의 아이디와 비번을 까먹어서 내가 따로 적어두었다. 답답하고 한심하다가도 그게 저 아이의 정도였다. 인정하면 쉬워진다. 바라는 것도 적어진다. 우리는 그 연약함으로 강하여진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억지를 부리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생각히 생각할 것만 생각하는 게 힘이다.

 

우리 주님의 특징을 다윗은 알고 있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22:28).” 그러므로 주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나는 이 말씀을 되새길 때마다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에 대해 더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 주가 높이시기를 바란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10).” 주 앞에서 낮추려 할 때 저절로 사람 앞에서도 낮추게 된다. 굳이 허세를 떨고 거들먹거릴 게 아니다. 공손함이란 자신을 낮추는 자의 미덕이다. 주가 도우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이를 알면 알수록 굳이 내가 내세울 게 없어진다.

 

물론 늘 돌아서서 느끼는 마음이다. 나는 그러지 말 걸, 하는 후회는 항상 뒤늦게 온다. 그런 나를 주께서 떠나시지 않는다니!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3:5).” 나도 내가 싫증이 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나를 늘 참아주실까? 아이가 많이 좋아졌다는 게, 기껏 열심을 다해 쓴 글을 그렇듯 허무하게 날리고 금세 훌훌 털어내는 게 기특하였다. 같이 내려와 음료수 한 잔씩을 마시고 아이는 돌아가고 나는 가족증명원서류를 떼려고 동사무소에 갔다. 그저 하는 것이다. 아침 일찍 장모를 병원에 모셔가고 모셔오고, 서둘러 점심을 먹고 왔는데 아이가 벌써 와 있었고. 그렇게 하루는 번거로웠으나 어쩌겠나? 닥치면 다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나는 이제 이 말씀을 사랑한다. 고질적인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도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서너 대 이상 주사를 맞는데 부분마취를 했던 모양이다. 장모는 그 통증을 이야기하다 오후에는 날아갈 듯 살 것 같다며 보행기를 짚고 걸음을 운동했다. 앞서 두려움이 엄습하고 적잖은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은 중한 것에 비하면 경한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래서 늘 병원에 다녀오면 얻는 게 많다. 사람살이의 고달픔은 말할 것도 없고 고통으로 그 본성은 감출 수 없는 것이며 내남없이 피곤한 인생이다. 의사도 숱한 환자에 시달려서 그런지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였다. 정말이지 모든 피조물은 구원의 날을 기다린다. 그러한 것에서의 구원이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2).” 그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8:19).” 그러니 저급한 몸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뀔 것이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3:21).”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사는 날 동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전 8:20).” 나는 다른 데 말고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굴복하기를 바란다. 비루하고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면서 마치 자신은 의로운 듯 자기주장을 일삼는 정치판과 우리 사회 전반의 고질적인 자기애의 현장에서, 이내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42:2).”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점점 내가 단순해지고 지루해지는 게 싫지 않다.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보다 점점 더 잘 듣고 싶어진다. 누가 나를 찾고 인정하고 의뢰하는 걸 바라기보다 아무도 나를 몰라주고 알아주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내가 나서서 무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를 의뢰함이란 최고로 단순해지는 삶이다.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 된다. 하나님으로 족한 것이다.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게 나의 그럴듯한 문장이나 표현보다 더 간절해졌다.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의 말보다 저가 찾은 성경을 메모한다. 다 아는 줄 알았던 내용인데 다시 쓰고 읽으면서 새롭다. 이 모든 게 주의 의도적인 계획이라니!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4-15).” 주가 다 이기신 싸움이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20:7).”

 

그러므로 오늘 다윗의 고백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여전하여서 내 안의 어둠으로 나는 늘 뒤늦은 후회뿐이지만,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20:4).” 주가 행하심을 신뢰한다. 나는 다만 또 하루 주어진 날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오전에 요양수급자 가족 설명회에 가야 한다. 그리고 장모의 수급증을 받아와야 한다. 나 말고 할 사람이 없다. 어쩌겠나? 요즘 자주 드는 태도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된다. 한 팔을 못 쓰면 다른 팔로 쓰면 되고, 한 다리를 못 쓰게 생겼으면 다른 다리로 가면 된다. 주로 아이를 격려하는 말로 더하는 것인데 고스란히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 되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초적인 자세가 아닐까? 이리 두신 이가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이시면, 다 그만한 이유와 의도하고 계시는 선이 있다. 닥치면 다 한다. 이 또한 할 도리다.

 

실은 다 주가 거저 주시는 바이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3-34).” 세상이 아무리 요지경이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국내정세나 국제정세나, 자국주의나 군국주의나, 애국애족이 우리의 사명은 아니다. 정작 그 물음에 우리의 대답은 내가 어느 쪽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20:7).” 주를 의뢰함이다. 고로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4).” 이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으면!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