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왕상 5: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4
서로는 인내의 때에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돕는 사이다. 자녀 학교에 ‘명상과 요가’ 시간을 교과목으로 하여 교장과 안면이 있는 누굴 교사로 세운 모양이었다. 참관 수업을 듣고 이건 아니다 싶어 반론의 글을 쓰고, 그것을 좀 봐달라고 할 때 기꺼이 나는 저의 글을 수정하고 도왔다. 그저 일반 학교여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데 성경적인 기독교 교육을 기반으로 하면서 교장이 임의로 그리 결정을 내렸다는 데에 놀랐다. 요즘은 성을 섹스라 안 하고 젠더라 한다. 청소년 프로에서도 이젠 스스럼없이 동거가 이뤄지고 성정체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은연중에 좋고 나쁨이 정렬하면서 옳고 그름은 판단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 아닌 건 아닌 것이지,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면서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는 것이다. 죄는 질병이 되었고 악은 취향이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성도의 인내’는 시험받는다. 보면 ‘그게 뭐 어때서?’ 하고 스스로 허용하고 살았던 것으로부터의 유혹이고 공격이다. 술에 대한 유혹은 술을 먹어본 사람에게, 흡연에 대한 욕구는 담배를 피워본 사람에게, 성에 대한 욕망은 그것들에 대한 허용의 범주에서 파생하여 더욱 확장한다. 안 해본 사람은 유혹도 적다. 성관계를 아예 갖지 않은 처녀에게는 자궁암도 생기지 않는다고 들었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항상 누구는 나에게 불만 섞인 듯 ‘그게 왜 나빠?’ 하고 되묻고는 하였다. 오히려 더 좋고 설득력이 있는 게 뉴에이지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걸 참 좋아하였다. 정서적으로 맞고 내 취향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경은 방법을 제시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는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고히’ 붙들어야 할 것을 알게 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도중에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들어보면 다들 그럴 수밖에 없는 지경에서이다. 또는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설마,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위험하다. 앞으로 점점 더할 텐데,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이를 끝이라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 24:6).” 휩쓸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 시대의 물음 앞에 우리는 굳건해져야 한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돌아오는 토요일에 장모는 본가로 가고 일상생활이 다가올 텐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썩 좋지가 않았다. 나는 장모가 계시는 동안 더 열심히 식사기도를 하였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저의 말을 들으며 그 여생이 주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였다. 너무 얽히고설킨 문제들이 많았다. 안 믿는 손자들의 등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같이 그냥 살자고 해도 피차가 여의치 않는 마음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내도 나름 피곤했던지 이가 들뜨고 사지가 쑤셨다. 노년의 때에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시험대에 오른다. 우리의 믿음은 다가오는 고난을 견딜 수 있을까? 육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곧 죽음을 맞닥뜨려야 할 텐데, 무엇으로 견딜 것인가.
그래서 말씀은 인내를 요구하시는구나(히 3:12).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믿음을 인내로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관계이다(13). 곧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시 95:7-8).” 스스로 완고하게 굴면 답이 없다. 완악함은 나란히 서는 것이어서 감사는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원망과 증오만이 남는다. 가장 눈에 띄는 데가 정치판이고 그것은 민심을 요동하게 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발판을 삼는다. 정치보다 영악스러운 죄는 없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서로를 날마다 매일 오늘이라는 시간에 서로 권고하고 위하여 함께 인내하는 것이다. 그 믿음의 인내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중도에 포기하고 곁길로 간 사람이나 여전히 몸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복음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나, 다들 나름의 지론을 구사하며 서로가 옳다하는 것이겠으니,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히 6:19).”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아이는 앞에서 일기를 쓰고 나는 설교원고 초안을 작성하면서 한 주가 흐르고 있었다. 오전에 병원에 들러 장모를 모시고, 아내를 데려다주고, 같이 점심을 먹고, 아이가 오고 가고, 하루가 어찌 지나는지 정신이 없었다.
다 저녁께 서류전형이 합격했다며, 면접일자를 받아 아이가 보내왔다. 어디 병원에서 청년 무슨 인턴 프로그램인가본데, 오늘은 면접에 앞서 아이의 말투나 성급한 답변을 훈련(?)시켜달라고 하였다. 마음은 그냥 그런 일은 안 했으면 싶은데, 아이엄마에게 말한들. 아이 또한 그러려니 하고 오히려 이제는 좋아라, 하는 것이어서. 사실 나는 점점 잘 모르겠다. 장모 일도 그러그러하니 안 그랬으면 싶은데 그게 내가 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자기 생각과 자기 판단들이 있으니 것도 또한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것이어서. 주께서 가르치고 이끄시고 함께 하실 것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다만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오직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성령이 함께 내주하지 않으시면 무엇으로 이 길을 걸어갈까? 세상은 요지경이고 사람마다 꼴불견이니. 살자, 살아서 알자. 아느라 아는 동안 살아서 사는 날 동안 몸소 구르고 깨지고 망가져야 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더욱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앞에 서게 되는 일이라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오직 주만이 하실 일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바라는 한 가지 소원,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어떠하였든 지난날에 대하여는 더는 돌아보지 않고 온전히 주만 의지하며 선을 구하는 일이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어떠하든 나와 함께 하셨음을, 나는 그 지난날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어떠하다 할지라도 함께 하실, 앞으로의 은혜에 대해 나는 포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한 가지, 오직 주의 아름다우심을 사모하며 주의 성전에 머무는 이것이라! 고로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왕상 5:4).” 그러할 때 행여 미끄러질까 조심하고 믿음을 잃을까 더욱 굳건하게 설 수 있기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나는 아이에게 되든 안 되든 모두 주의 인도하심은 확실하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믿는 주는 전능하시다. 누구에게 일러주었다. 어줍은 판단과 기준으로 서지 말자. 내 지식, 내 학위나 확신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시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그러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이유였다.
곧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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