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전봉석 2019. 9. 10. 07:0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상 11:2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시편 33:10

 

 

우리 사람의 됨됨이에 대하여 솔로몬의 노년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일찍이 그보다 더 은혜를 입은 자가 있었을까? 한데 오히려 저의 풍성함이 저를 병들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이미 말씀하신 바이다.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구분이 없으면 선을 넘고 흐트러진 선을 따라 기준은 모호해지게 돼 있다.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이에 따른 준엄함을 어찌 저는 놓친 것일까?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마음이 가는대로, 당신이 원하는 걸 해!’ 하고 부추기는 세상에서 오늘 이 말씀은 엄청난 경고표지판 같다(왕상 11:2). 다 나름은 이유가 있었겠지!

 

모든 존재는 다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교과서이기보다 편지글이다. 어떤 공식을 기계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똑같은 죄를 마주하게 하신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17).”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이를 경계하지 하지 않으면 천하의 솔로몬도 속수무책이다. 그처럼 잘 알고 명석하고 지혜가 넘치는 자가 전무후무하였다. 우리는 모두 죄인인데 죄의 행태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다는 게 말이 안 되듯이. 내가 지금 어떠한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아프지 않으면 모른다.

 

마치 중력의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제트운전의 추진력을 계산하지 못하면서도 비행기를 타는 것처럼,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상호작용을 알지 못하는데도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정리하여 납득한 뒤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은 없다. 그럼에도 천하의 솔로몬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는지, 오늘 말씀은 현미경으로 보게 하신다. 이에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33:10).” 아무리 잘난 줄 알고 나름 자부하며 자신하는 일이었다 해도 한순간이다. 역설적으로 성경은 그와 같이 나를 이끄신다. 내가 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묘사되는 이야기와 전달하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의 이해와 상식과 지식을 넘어서 나를 이끄신다.

 

나는 이 능력을 믿는다. 아이를 대하면서 말씀이 아니고는 감당이 안 될 때, 더욱이 말씀을 의지한다. 스스로도 답답한 노릇이다. 올 때가 지났는데 아이가 오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슬슬 걱정이 될 때 아이가 왔다. 오다가 옷을 하나 사 입고 모자를 새로 샀다. 전날에 그렇잖아도 지갑에 돈이 좀 있다 싶어 얼마를 맡아둘까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리곤 몇 백 원을 내놓으며 점심을 못 먹었다고 하였다. 며칠 전에는 이어폰을 샀다. 바로 전에는 안경을 새로 했다. 그와 같은 충동이 아이를 주체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놓고는 밀려드는 후회라니! 왜 갑자기? 하고 아무리 뭐라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핸드폰은 배터리가 다 된 것을 모르고, 내가 준 가방도 이어폰도 필기구도 몇 갠지 모른다. 야단을 좀 쳤다. 알아듣게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도 늘 되풀이 되는 일이다. 데리고 내려가 순댓국을 먹였다. 올라와 글을 쓰고 성경을 읽었다. 성경의 실재는 우리가 모르는 중에도 우리를 이끄신다.

 

그러니 아이엄마나 형아 애는 그 속이 오죽할까. 말씀은 그러한 우리를 연합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이는 엄연한 증거가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비록 아이의 오늘이, 저 답답하고 또 똑같은 일의 반복이 우리를 싫증나게 하고 지치게도 하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읽는다. 뭐라 하면서 그게 곧 나이지 않은가, 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은 엄연히 성경을 통해 인도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니라(삼상 3:21).”

 

그래서 나는 아이가 아는지 모르는지, 그것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으나 확신한다. 곧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러므로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이 족하리라(20:13).”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를 따라가게 하신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 뭐라 한참 야단을 치다가도, ‘아 아픈 아이인 걸!’ 하면서 나는 또 측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순간적으로 충동이 일어 그와 같은 소비 충동은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하는 죄의 단면을 축약하고 있는 것 같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도 그렇단다. 나는 아이에게 이실직고하듯 위로하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한량없는 주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로써 말씀을 주셨다. 그럼에도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먹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존 파이퍼 목사는 스스로의 삶을 성경의 포로가 되어 살았다고 행복해하였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24-25).” 아이가 돌아가고 주의 말씀 앞에서 녹초가 되었다. 한참 뒤에야 아이엄마가 들려 보낸 멸치선물세트를 보았다. 문자로 고마움을 표하자 늘 써주시는 마음에 비하면 너무 약소하다’고 하였다. 순간 그 문장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고 동시에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마음이지 않겠나, 생각하였다.

 

나의 전부를 드린들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나 같은 죄인에게 저처럼 귀한 한 영혼을 맡기신 것인데, 이를 싫증내고 짜증스러워하였던 점이 부끄러워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성경은 신앙의 안내서가 아니고, 매뉴얼도 아니고, 공식을 적어놓은 교과서도 아니다. 그 이상이다. 하나님의 감정이 드러난다. 싫고 좋고, 마음 상하시고 기뻐하시고, 그럼에도 긍휼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편지다. 발신자의 감정은 읽는 우리에게 맞닿아 같이 공감하고 감동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같이 한다. 성경은 결코 기계적인 서술이 아니다. 단지 역사서도 아니다. 그러해서 그러하였다는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다. 솔로몬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노년을 주관하실 수밖에 없었다. 저는 변질하였으나 저를 끝내 버리지는 않으셨다.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왕상 11:32).”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36).” 그저 다 지우고 새로 쓰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이로써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72:19).”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향한 참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때론 이게 맞나?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얘를 어쩌면 좋을까? 그런다고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싶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반드시 때가 이르리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주를 보고 하자. 말씀에 붙들려서만 하자. 내가 저 애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저 애를 사랑하시는 주께서 내 안에 주의 사랑이 넘치게 하심으로! 내가 한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의 마음으로만이 더하시는 은혜였다. 점점 세상에서 성경은 도전을 받을 테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는 사람은 더욱 말씀만 의지할 따름이다. 결코 성경은 고서적이 아니고 연구하고 탐구는 것으로 그칠 역사서가 아니다. 교과서가 아니고 율법서도 아니다.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4:12).” 다른 것은 붙들지 말고 말씀만 바라자. 이는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33:1).”

 

이는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