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전봉석 2019. 9. 12. 07:33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왕상 13:29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편 35:9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한다. 이에 저를 속인 늙은 선지자가 참 선지자인지 거짓 선지자인지 난해하다. 저가 젊을 때는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늙어 자신의 호기로 주의 일을 그르치는 것을 보면 알만하다. 반복되는 표현 중에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8)”에 나오는 이곳에서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하는 것이다(9, 15, 16, 17, 18, 19, 22, 23). 이곳은 벧엘로 하나님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변한 곳이다. 이를 엄연히 알리고 고하여야 할 사명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있었다. 어쩌면 늙은 선지자는 저가 그러다 건강을 해칠까 하여 안쓰러움으로 저를 속여서라도 무얼 좀 먹이고 마시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먹고 마시는 일이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를 몸소 굶음으로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남유다로 온 하나님의 사람을 늙은 선지자는 표면적인 상태만 본 것일까? 저의 호의적인 거짓말에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겨주는 마음이 먼저 드는 것도 개운하지가 않다. 늙은 선지자의 교묘한 타락은 정작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한 데 따른 표본이 되는 것 같다. 인지상정이 아니다. 측은지심도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읽지 못했다. 어쩌면 저는 자신이 보기에 더 나은 쪽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좀 더 주석을 찾아보던가, 어느 연구자의 글을 읽어봐야겠지만 여러모로 호의와 선의가 결코 하나님의 뜻에 중심에 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저가 결코 악의적으로 그러한 일을 행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29).”

 

아침에 일어나 묵상을 하는 일이 그래서 내게는 중요하다. 추석 앞두고 타이어를 점검하고, 기름을 채우고, 세차를 하고 왔다. 아이가 와서 같이 식사를 하고 글을 쓰고 성경공부도 하였다. 어디 아픈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데 어깨가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난다.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고달팠다. 급기야 진통제를 먹었고 좀 누워있자나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설사를 하고 이제는 속을 또 달래야 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딸애와 아내는 짐을 챙기는데, 나는 사실 먼 길을 가야 해서 불안해서 그런 것인지 실제 아픈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저녁을 먹고 다시 진통제를 먹을까 하다 무서워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누웠다. 때론 나의 몸이 너무 지겹고 힘들다. 아프다는 소리도 미안한 일이다. 차라리 잘 됐다 싶은 것이 이번엔 장모가 편찮아서 은근히 친정에서 명절을 보냈으면 하는 아내의 마음도 있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 속이 오죽할까. 종종 나의 연약한 몸은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추진력 있게 일처리를 한다. 싫든 좋든 그리 이끄는 것이다. 조금은 속상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나의 이 어쩔 수 없음을 가지고 나는 주를 바란다. 아니면 위로가 없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35:9).” 무책임하고 저 하나 건사하느라 꼴이 말이 아니지만,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주를 즐거워함이라니!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에게 긍휼을 더해주세요. 나는 염치없게도 이와 같은 기도를 연거푸 되뇐다. 이걸 기도라고 아뢴다. 종종 사는 게 너무 미안하고 염치없게도 여겨진다. 그러면 우울한 마음이 엄습한다. 이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곁의 식구들에게 미안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말씀으로 숨는 게 아닐까? 이건 온당하지 못한 게 아닐까? 비겁하고 옹졸한 자기도피가 아닐까? 뭐라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프니까 안 아프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밖에는 달리 고상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고달프고 힘드니까 살려주세요, 하는 말만 나오는 것이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늙은 선지자의 심정을 이해한다. 저가 그저 무력한 삯군이었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한 퇴락한 선지자였다 해도, 왜 자꾸 저의 측은지심에 마음이 가는 것일까? 안 됐고 서글프다.

 

이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바로 읽고 아는 분별이다. 바르게 기억나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내 아무리 이해하고 판단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의 노력이 이 길을 가게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도 쩔쩔맨다. 하물며 아이를 대하는 일이나 내 곁의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대하여 나는 점점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여실히 느낄 따름이다. 곧 나의 어쩔 수 없음은 날로 늘어간다. 그러할 때도 내가 종일 주를 말하고 종일토록 주를 찬송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기도가 너무 누추하고 유치하고 별 것도 아닐 수 있으나,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의 긍휼하심으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달리 더 나은 기도를 아뢰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다.

 

늘 나는 부모에게 죄송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좀 괜찮은가, 하고 아침 일찍 문자를 주셨다. 늙으신 부모 앞에서 더 아파하는 것이 송구하다. 그래도 감사한 게 어깨 통증이 어지간하여 이처럼 묵상글을 쓰고 다시 주어진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사는 동안 살아서 그 송구함으로 더욱 위하여 기도하자. 평생을 나로 인해 마음 쓰고 안타까워하였을 저들의 여생이 다만 송구할 따름이다. 어쩌겠나? 이 또한 나로 여기에 두신 것을. 딸애에게 미안하고 아내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지만, 아프다는 건 어쨌든 주를 바라는 데 있어 내밀한 간절함이 내포되어 있다. 아니면 위로가 없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35:9).” 어찌 이런 상황에서 주를 즐거워할 수 있겠나,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욱 다른 즐거움이 없다는 데 안도한다.

 

그러므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27).” 여기서 나의 의란 나의 어떤 공로가 아니라, 이런 중에도 주를 바라게 하시는 주의 의다. 하나님의 영광은 좌우지간 내가 주를 기뻐하고 의뢰하고 주님만으로 충만할 때 가장 영화로우시다. 나에게 이와 같은 확신을 주시는 말씀이 내게는 복이다. 그러므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10).” 오늘의 이런저런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2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