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19. 9. 14. 07:22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왕상 15: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5-6

 

 

죽어서도 다윗은 다윗이구나, 싶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5).” 열왕들의 시대에 다윗은 모든 이의 기준이 된다. 이는 그의 살아생전 고백에서도 들을 수 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37:5-6).”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되새기게 한다. 나의 날 동안에 주가 베푸시는 은혜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내와 딸애는 처가에 가고 나는 글방에 올라가 그들을 만났다. 가족도 없고 그 몸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힘겨운 고통을 여실히 보았다. 그러는 중에 나름의 위로를 찾았고 이는 참으로 기구하고 처량하였다. 한 친구는 뜬금없이 묵주를 손에 감고 있었다. 천주교를 나가 새삼 교리를 배운다고 했다. 세례명을 갖고 싶다고 하였는데 실은 그들의 친절과 자유로움이 좋았다.

 

또 한 친구는 어느 교회를 오래 다녔고 그 이유는 방언을 하여 놀라워서라고 했다. 한데 그 담임 목사가 구속되었고 징역을 살고 있으니 성추행을 저질렀으며 자신이 구세주라고 했던 이였다. 그나마(?) 교회를 다닐 때는 위로가 있었는데 것도 그만둔 지 몇 년째여서 마음은 허하고 생은 고달프다고 하였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두 번 하였고 그 이후로 걷는 게 불편해졌다. 보육원을 나와 죽어라 하고 번 돈을 각각 천만 원씩 두 번을 날린 셈이니 그 허망함에 대해서는 말해 뭐할까? 악착같이 모아 현금화하고 금으로 모아 가지고 산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저도 주의 품을 그리워하나 그 처지와 형편으로 선뜻 나갈 수 있는 교회를 새로 찾지 못하고 몇 년째 배회중이라고 하였다. 마치 서로 경쟁을 하듯 이야기를 쏟아냈고 나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번 추석은 그러라고 나를 붙들어두셨는가, 생각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친구 내외가 들러 선물세트를 주고 가기도 하였다. 저들과 있을 때 저가 와서 본 것도 어떤 작용을 할 것 같았다.

 

다들 돌아가고 한 친구만 좀 더 남아 속엣 얘길 더하였다. 안됐고 미안하고 속상하였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기도를 하겠다고 자청하여 저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불러 고하였다. 우리에게 두시는 날 동안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시기를. 나는 집에 돌아와 아팠다. 이상하게 오른 손목을 쓸 수 없었다. 지금 자판을 치는데도 신경이 건드려져 통증을 느낀다. 마음이 안 좋은 게 몸으로 전해져 실제 육체의 고통으로 나타나는지, 말 그대로 스트레스 때문인지, 나는 이 손이 아파야 할 아무런 이유를 모른다. 저들의 생이 왜 저처럼 기구하고 처량하고 눈물겨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자꾸 속상하고 안쓰럽고 답답하여 서러웠다. 형 편하게 연락해도 돼요? 하는 누구의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저는 난쟁이였고 두 번의 디스크 수술로 걸음을 잘 옮기지 못하여 한참을 어기적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주일에 올 수 있으면 와, 같이 예배드리자. 아니면 집 앞 가까운 교회에라도 나가. 주님이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거야. 잘 가라, 인사하고 나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고 두려움도 앞섰다. 이러한 만남으로 주께서 의도하시는 게 무얼까? 생각이 많아졌다. 피곤에 절어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새벽에 깼다. 손목이 욱신거리고 쑤셔 그 고통이 적잖았다. 아픈 게 참 지겹다. 사는 일이 다들 참 힘겹다. 나는 말씀 앞에 앉는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마음이 어지럽다. 속상하고 답답하다. 그런 와중에 스스로 위로를 찾으려고, 세례명을 갖고 싶다니! 외로울 땐 티켓 아가씨를 찾았고, 하도 답답하여 5만원 주고 사주도 보았다. 저들은 덤덤하게 말하였고 나는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나도 모르는 동안에 저들의 명절은 번번이 그러하였고, 그 일상은 마지못해 사는 힘겨움이었구나. 새삼스럽게 주님은 내게 왜 저들을 보내신 것일까? 그때 하필 동거 중인 친구 내외의 느닷없는 방문이라니! 이게 뭐지? 나는 지금 손목 심줄이 왜 아픈지 모르겠다. 자판을 칠 때마다 아파서 눈물이 핑핑, 돈다. 사는 게 다들 너무 고달프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나는 흐느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의 은혜로 돌이키시고 바른 길로 가게 하시기를.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이 땅의 생으로 전부가 아님을. 너무 억울해하고 서러워하지 않기를.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처지의 처절했던 삶에 대하여는 주의 선하심으로 반드시 갚아주실 것을. 부디 예전의 믿음과 그 신앙을 회복하기를. 기껏 세례 교인들이면서, 세례명이 갖고 싶어! 누구누구랑 같이 교리 공부를 하는데 가족 같은 분위기라 나만 빠져나오기가 그래. 아니 저들의 관심과 위로가 좋아. 그러면서 먼저 돌아간 친구에 대해 나는 더 뭐라 할 수 없었다. 저는 들어서자마자 내게 교횐 어디야? 아니, 그래도 교회를 교회답게 해야지! 하였던 저의 첫 인사가 어떤 의미인지도 알겠다. 과연 내가 손에 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맞을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1:12).”

 

다들 돌아가고 저들이 들고 온 선물을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으로, 감사한 마음보다는 서러움으로 들고 나올 때 손목의 신경이 어디 놀란 것일까? 왜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고통스러운지 모르겠다.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금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난쟁이 친구는 갑자기 자기 목에 걸었던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주었다. 못 가도 30만원은 갈 거라면서, 줄 게 없어 이거라도 주고 싶다며 억지로 떠안기듯 내게 건넸다. 어쩌면 그 말이 마음에 더 아팠을까? 아니면 큰 부담으로 나를 짓누르는 것일까? 왜 나는 지금 몸이 아픈 것일까?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저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나에 대한 미련인지 연민인지, 애통하는 마음으로의 주를 바라는 심령인지 그저 서글픈 서러움인지. 마음이 어렵기만 한 내게 오늘 말씀은 일침을 가하신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37:3).”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주만을 의뢰하게 하시려고, 그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만을 먹을거리로 삼게 하시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