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전봉석 2019. 9. 22. 07:1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왕하 1:3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아합이 죽고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저는 병들자 이방 신 바알에게 물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신앙 상태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 1:3).” 답답한 노릇이다. 재미삼아 토종비결을 묻고 사주를 따르며 관상을 보고 하루의 일진을 운세로 점친다. 버젓이 이를 방송하고 오락으로 즐기며 대놓고 의식을 치른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고 아프지 않았다.’ 우리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이 눈 뜬 사건과 이에 살벌하게 논쟁하며 싸우는 내용이 떠오른다. 아프고 힘드니까, 다급한 마음에들 그러는 것이겠으나 눈을 똑바로 뜨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우상을 더듬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의 세상이다.

 

아침에 일찍 글방으로 올라갔다. 아침마다 거의 그렇지만 특히 토요일이나 주일 날 아침에는 그 고요함이 아늑하다. 다들 텅 빈 사무실이라, 찬양 연주곡을 틀어놓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아침에 쓴 묵상 글을 다시 읽는 즐거움이라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5-6).” 부르심은 순종을 요구하고 순종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식을 알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 그러했던 시절을 통회하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누구와 누구를 생각하면서 애통해한다. 책상 밑에 난로가 이제는 따뜻하게 느껴지는 계절이 되었다. 영적으로 눈이 멀었을 때는 나 역시 운세를 보고 하루 일진을 고르고 로또를 사고 우상을 숭배하듯 온갖 의미에서 위로를 찾지 않았던가.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일이며 나의 임금으로 저의 통치를 즐거워하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5:31).” 설교 원고를 다시 읽고 되새김질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말씀을 분별하고 깨닫고 더욱 사모한다. 순종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 먼 사람들의 세상이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11:8).” 혼미한 심령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피폐하고 그 영혼은 갈급함으로 미신을 탐닉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는 저들의 숙명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2:21).”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누가 다시금 주 앞에 돌아와 주일을 지키고 예배에 나가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한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64:7).” 본다고 하고 스스로 잘 안다고 하는 이들의 자기고집이 결국은 영적으로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것이 눈이어서, 보통 하루에 25천 번 이상을 깜빡거리고 적당한 양의 눈물로 씻어내는 일을 함으로 본다. 영적으로도 이와 같은 수고와 습관이 필요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도로 눈이 멀거나 흐려져 사리분별을 못할 수 있다. 이를 요한복음 9장은 여실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일까?

 

첫째는 잘못된 통념이다. 보편적인 생각과 이론과 지식이 우리를 의문하게 하고 주저하게 한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9:2).” 지금도 다를 게 없지만 무슨 일이 터지면, 어떤 질병이나 난데없는 어려움을 두고 우리는 흔히 죄 받았다 그런다. 죗값으로 벌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생각은 우리나 동양쪽 문화권에서 더 심하다. 유교나 불교가 유난하다. 실제 태국에서는 자녀들에게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거나 눈이 먼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게 가르친다. ‘전생에 무슨 죄가 그처럼 커서!’ 하는 따위의 푸념이 예사다. 살면서 무슨 악을 그처럼 범해서 저러한 험한 꼴을 당하는가, 하는 따위의 사회적 통념이 우리의 분별력을 흐려지게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이 모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나타냄이다. 곧 우리의 영적인 눈은 말씀만이 열어주신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19:8).” 그리고 둘째는 어떤 형식과 원칙에 함몰된 율법주의 때문이다. 엄연한 사실은 소경이 눈을 떴다는 증거인데 배웠다고 하고 지도자들이라 하는 자들이 더 나서서 어떤 원칙을 따지고 형식과 규칙에 몰두하였다.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9:16).” 일주일에 교회를 몇 번 갔고, 기도를 몇 시간 했고, 성경을 올해 몇 번 통독했으며, 몇 사람에게나 전도를 했고, 그 열심을 다했는지!

 

셋째는 그러므로 자신은 잘 알고 있다는 우리의 교만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흐리게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 그러자 저들은 비웃으며 어이없어 한다.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셨다(40-41). 종종 보면 성경 좀 본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완고하다. 안다고 좀 아는 그들의 지식이 설교를 평가하고 말씀을 걸러서 듣고 판단을 하여 사람들을 충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다. 우리의 지식이 언제든 교만이 될 수 있다. 내가 아는 누구는 한글 번역 성경보다 영어로 읽고 해석하고 그 어원을 따져 라틴어를 들먹인다. 뭐라 말씀을 가지고 권면하면 정작 저는 그 말씀의 의미가 헬라어로 혹은 히브리어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주목하느라 듣고는 달리 해석해서 흘려보낸다.

 

정작 바울의 태도는 달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9).” 그리하여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기를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간곡히 말하였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왜냐하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저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눈이 먼 세상이다(1-7).

 

토요일 날, 아무도 없는 빈 곳에서 나는 이와 같이 말씀을 되새기고 묵상하며 메모하고 누구와 잠깐씩 카톡을 하고 주일을 권하면서 보냈다. 이제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확신하고 그 확실한 데 거할 수 있는 것이 복이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45:6).” 전생의 죄를 운운하고 온갖 우상숭배에 눈 먼 시대에 우리는 오로지 말씀으로 바로 붙들려서 말씀만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19: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