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왕하 2:8-9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모든 시대는 가고 한 인물은 바뀌어도 주의 역사는 계속된다. 성령의 갑절을 구하는 엘리사의 심정을 이해한다. 이를 엘리야는 나무라고, 오늘 시편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 같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사람이나 그 시대가 대신할 수 없고 이를 감당할 수 없다. 내게 닥치는 우환이나 환난이 이를 훼방할 수 없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119:143).” 이를 주의 이름으로 받아들임이 귀하였다. 저마다 어려움이 있어 나름의 사정이 있지만, 아이는 잘 이겨냈고 말씀으로 순응하였다.
우리는 남아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이야기를 읽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우리의 의지나 결단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 아이는 예배에 오면서 안정제를 한 알 먹었고 일상 중에도 조심조심 자신을 돌보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신뢰하였다. 누구는 교회를 잘 다녀왔는지, 저의 ‘번아웃증후군’은 어찌 잘 견뎌냈는지, 궁금하였으나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음으로 생각날 때마다 주의 이름을 불렀다. 모두가 나름의 어려움과 사정을 붙들고 주 앞에 나아왔다.
우리의 죄는 번번이 되풀이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죄성을 고단해하며 주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바랐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그러한 우리의 자질과 기질을 잘 안다면 그러므로 더욱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의 값을 바로 분별할 수 있다. 아이는 이를 인정하였고 나는 그러한 아이의 심령을 사랑하였다. 결코 우리의 씨름은 이 땅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 그 싸움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보다 어리석은 게 없고, 이를 짊어지고 자신이 견뎌내려는 의지보다 미련한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할 때 실은 우리가 종노릇하였던 것으로부터 놓여나게 하신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5-16).” 하면 오늘 본문의 엘리사의 간절함이 우리에게는 필요하겠다. 저가 아이들의 놀림에 대처하는 것은 옳지 않음에 대한 단호한 결행을 보여주는 예시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3-24).” 문맥적으로는 매우 잔인하고 포악스런 이야기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무지가 가져오는 무모한 가벼움에 따른 엄한 경고이다.
때론 주의 일에 있어 난해하고 어려운 내용이 있다. 어떻게 아이들에게 저토록 잔인할 수 있나 싶지만, 이는 문맥적인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여러 해석이 따를 수 있겠으나 주의 사람과 주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단호하고 엄중하신 경고의 메시지다. 그래서 말씀이 응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어려우면서 두려운 일인지,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우리의 감상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이 때론 바로보지 못하게 하는 선입견을 두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두시는 육신의 어려움과 마음의 고단함을 그리 이해하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일러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그릇된 길로 가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어려움과 때론 그 극심함을 감사함으로 받자고 일렀다. 이것은 모두 영적인 일이다. 단지 사는 데 따른 삶으로 그치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잔인하고 허탈한 일은 없겠다.
우리는 이제 주저할 것이 없다. 우리는 다만 주의 이름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죽이시든 살리시든, 내가 살든지 죽든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이와 같은 은혜와 은사는 모두 주의 것이다. 우리로 이를 사모하게 하시려고 저마다 어떤 어려움이 도리어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은혜로다.’ 이를 감사함으로 받으면 은혜 아닌 것이 없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12).” 아이는 이를 받아들였고 받아들임으로 얽매이지 않았다. 순응이란 믿음의 또 다른 증거이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딤전 4:4).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시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엘리사가 그처럼 갈구하였던 성령의 갑절을 우리는 바란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증거가 되신다. 아이가 올라오고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히 여겨 찬송과 경배로 화답할 수 있는 일. 누가 교회에는 잘 갔는지, 주일 하루는 어떠했는지, 하는 마음쓰임이 우리의 사역이었고 이것으로 주께 구하고 바라는 일이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우리는 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심이다. 우리 속에 계심이다. 거듭남이란 전혀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혀 달라진 모습을 서로가 아는 일이다. 이를 신비하게 여길 따름이다. 왜냐하면 나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코 주님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
이를 붙들고 의지할 수 있는 게 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로 알게 하시는 이와 같은 능력이 값지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주 안에서 성실하게 감당하면 되었다. 우리 안에 두시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더는 우리로 환경의 지배를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2-3).” 고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7).”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나를 진정시키신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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