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전봉석 2019. 9. 24. 07:12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이하였음이라

왕하 3:2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47:6-7

 

 

죄로 물든 내성은 어김없이 되풀이 된다. 여로보암의 죄는 벧엘과 단 두 곳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하게 하였고, 레위 지파가 아닌 자들을 세워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하였으며, 율법을 어기고 절기를 마음대로 옮겼놓기도 하였다. 이를 여호사밧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3).” 우리의 죄과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역이다. 그리고 죄악은 일그러지고 왜곡된 행위를 저지르는 일이다. 죄는 의당 그러해야 하는, ‘과녁을 벗어난 화살같아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가령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선하고 의롭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며 그 삶과 행위가 모두 옳다고 해도 저의 죄과는 그 어떤 악행과 다를 게 없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름으로 그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줄 모른다.

 

오전에 옆 사무실 누가 건너와서 차를 한 잔 대접하였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 주말이면 산을 타고, 주중에는 두 번씩 춤 교실에 나가 사교댄스를 추며 몸을 돌보고, 얼마 전부터는 악기를 하나 연주하고 싶었다는 꿈에 도전하여 색소폰을 배우고 있다. 중고등학교 동기동창들 회장을 맡아서 경조사를 챙기고 나름 주어진 생을 성실하게 살며 자식 농사도 반듯하게 잘 지은 셈이었다. 저는 잔잔하게 틀어놓은 찬양을 따라하며 어릴 적 그 노래를 잘 안다는 식으로 입을 열어 한참을 너스레를 떨다 갔다. 저는 결코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을 반역한 적 없고 그 뜻을 거스르며 살지 않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하였다. 굳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유였고 하나님 없이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노라고 항변하듯 말을 잇고는 하였다. 나는 저의 말에 그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라 한들. 죄란 곧 불순종의 삶인 것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회개 없는 모든 인생은 역겨울 따름이다. 화성살인사건의 연쇄 강도나, 저나, 나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이다.

 

죄를 자각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고백은 없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죄 때문인 것을 저는 알지 못한다. 성경의 주된 의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찌 살았고, 남들 못지않게 성실했네, 정직했네, 의로웠네 하는 따위의 항변은 모두 부질없다. 이를 알게 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시편 51편의 고백일 것이다. 천하의 다윗이 저지른 죄를 보면 참으로 파렴치하고 악랄하고 치졸하며 위선적이고 사악하다. 그런데 저는 그런 일을 저지르고도 버젓이 잘 살았다. 하나님이 나단을 보내셔서 저의 죄를 지적하기 전까지 저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타성에 젖었고, 하던 일에 전념하느라 한 일에 대해 무심하였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였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 아무렇지 않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당장 고열이 나고 고통을 호소하며 병의 증세로 시달리는 사람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국 회개가 없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다. 회개의 첫 걸음은 죄에 대한 자각이다. 이를 인정하고 그래서 모든 일을 멈추고, 다시 생각하여 자신의 치부를 가감 없이 주 앞에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당장의 병세를 치료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병원을 찾고 용한 의사의 처방을 따르듯이 우리는 주 앞에서 우리의 영혼과 영생의 문제로 처절해야 한다. 그저 이번 달 월급이 얼마 더 오르고 승진을 하고 누구와 어떤 일을 도모하여 성과를 내고 차를 바꾸고 집을 넓힘으로 만족할 일이 아닌 것이다. 죄란 얼마나 유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었나! 그러므로 죄과란 제멋대로 하려는 요구와 원하고 즐거운 일에 대한 의도적인 열망이었고 적극적인 관여였다. 겸사겸사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노인은 이를 혐오하고 그래서 자신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투의 논리를 폈다. 하긴 그래서 점점 더 사람이 몰리는 큰 교회를 부흥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죄악이란 참으로 비열하고 치졸하고 유치하며 왜곡된 상태의 열심이다. 그러할 때 다윗의 고백은 매우 역설적이고 강한 어조의 회개였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여기서 주께만 범죄하였다는 표현은 어찌 보면 말도 안 된다. 저는 밧세바라는 한 여성의 인격을 모독하였고 성적으로 강간하였으며, 저들 부부의 신의를 깨뜨렸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의도적으로 살해하였고, 이를 도모하느라 무고한 군사를 치열한 전쟁터로 몰아넣어 함께 죽게 하였으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시치미 떼고 은폐하여 평소의 일상을 영위하려 하였다. 그러던 저에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어 이를 직시하게 하였고 돌이켜 회개가 드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죄를 지었으면서도 하나님께만 범죄하였다는 표현을 쓴 것일까? 이는 곧 말할 것도 없는 명징한 죄악이기 때문이다. 저가 한 여인을 강간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였다. 이를 은폐하려 살해를 계획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모의하고 실행하고 이를 은닉하는 데 있어 요압을 끌어들이고 군사를 덩달아 죽게 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위계 질서에 대한 명백한 죄악이었다.

 

곧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저들을 그리 대하고, 처리하고, 대처했던 모든 게 다 극악무도한 죄과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과 이상의 소소한 이야기 가운데서의 교훈이 두렵게 다가왔다. 개는 개고 돼지는 돼지다. 그럼에도 개 같고 돼지 같은 삶이라니, 우리의 죄가 얼마나 극렬한가.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오늘 우리 사회의 설왕설래를 뉴스로 보다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너무도 명징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주를 바라게 된다. 서로의 손가락질이 결국은 자신을 향한 것인데도 자기의 손가락질을 멈추지 못하고, 말과 말은 싸지른 대로 악취를 풍기는데 그 위에 도로 눕고 이를 핥으며 그 구덩이에서 서로 눕고 뒹구는 형국이다.

 

오전에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주워내며 자신의 노년을 열심을 다해 산다고 사는 이의 열변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주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들 자신만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주께만 범죄하였사오니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만이 비로소 오늘을 바르게 사는 열쇠다. 그 열쇠구멍은 회개다. 돌이켜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나는 주 앞에서 범죄 하였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순종은 피해갈 수 없는 것으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6:17).” 성경은 우리를 주시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어서 귀하다. 곧 우리로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이 비밀의 계시를 알게 하신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하는 것이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25-27).”

 

이 계시로 능히 우리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다. 아픈 아이여서 저 아이만 그런 게 아니고, 노인의 삶이 누구보다 열심이고 치열하고 성실하여서 저 노인만 하나님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게 아니고, 사람은 본래 하나님 모시기를 다들 싫어한다. 죄를 직면하고 자신의 죄악 됨을 인정하는 일이란 그러므로 은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회개가 아니었다. 우리 안에 계신 주의 영이 하시는 일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지혜이시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그저 잘 살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잘 살다오라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죄를 알고 직시하여 주 앞에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7-18).”

 

그러므로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4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