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왕하 19:3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편 73:24-25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하는 말씀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앗수르의 침공으로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도 무릎을 꿇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의 근거가 됨을 알린다. 요즘 내 주변을 둘러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된다. 오후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으로 그의 처와 같이 부부 성경공부를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였다.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하며 부끄러운 마음인데 말끝마다 교회로 돌아가기를 당부하고 주의 살아계심을 이야기해준 덕분이라는 데 감격스러웠다. 또한 은둔하던 아이가 방에서 나와 나에게 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어서 나는 저 아이를 두고 여러 생각이 많아졌다. 누구랄 것도 없이 곁에 있는 이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왕하 19:3).” 누가 일부러 성경공부를 오거나 어디 가까운 교회라도 나가기 시작하였다는 소식보다 반가운 게 또 있을까? 안달을 부리고 채근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친구의 말처럼 ‘말끝마다’ 뭐라 나무라듯 믿음 생활을 당부하였던 말이 정작 나는 잊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결단의 계기가 되었다니! 소위 사람들은 말하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입만 살아서!’ 하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실은 무서운 소리다. 저들도 알지 못하면서 하는 소리다. 오늘에 이르러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4-25).”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고 나에게 교훈으로 인도하실 이 없다.
요 며칠 아이와 같이 책장을 정리하고 수선을 피워서 그런가, 공휴일인데도 허리와 어깨가 아파서 조용히 교회에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함께 하도록 곁으로 보내시는 이들의 면면이 새삼스러웠고 때로는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다가도 그 짐으로 인하여 주를 더욱 의뢰하게 되는 마음이 신기하였다. 당장에 ‘알바로 오는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적잖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시급 만원으로 여기 와서 잔심부름이나 시킨들 그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싶기도 하고 행여 아이의 조울증이 도저 그 심리적인 불안이 소요를 일으키면 어쩌나하는 나의 병적인 기우로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 앞에서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럼 그게 무언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10).” 이 한 구절 가운데 모든 열쇠가 있었다.
저는 그냥 나 몰라라 해도 되는 관계가 아니다. 형제다. 믿어야 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내가 저를 사랑함은 내 안에 거리낌이 없는 일이어야 한다. 즉 내가 주의 안에 산다는 것은 주가 행하신 대로 나도 행하는 일이다.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은 진부한 구호 같지만 최종적인 목적이다. 이는 옛 계명으로 이미 들어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다(7). 예전부터 있었다. 성경이 약속하신 바이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 하나님의 은혜의 출처이다. 곧 이는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참빛은 예수님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나의 교훈이 되어 내가 주를 사모한다는 오늘 시인의 고백은 내 것이다. 나는 저 친구를 위해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저의 입에서 ‘이게 다 네 덕이야.’ 하는 소릴 들을 때의 부끄러움과 동시에 송구함과 감사함이 뒤섞여 마음이 뜨거웠다. 이는 새로운 사랑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그저 막연하게 내가 인간적으로 친구니까, 딱하고 안 됐으니까, 인지상정으로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께 받은 사랑으로 그 값을 대신하는 사랑이다. 천만금을 주어도 값을 다 할 수 없고 내가 나의 목숨을 내어준다 해도 내가 받은 주의 사랑을 대신할 수 없겠으니,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저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심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늘 미안하고 가짜 같고 별 볼일 없는 일처럼 여겨지는 나의 마음을 그처럼 후하게 값을 쳐주심으로 ‘이게 다 네 덕분이야!’ 하는 친구의 말이 나로 하여금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정 아무나, 이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 때문에 부담이 되는 마음도 실은 저가 나의 형제라! 그저 먼 거리에 있는 타국의 누구, 익명의 사람들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나의 친구에게 충만하기를, ‘알바로 오는 아이’의 속에 충만하기를,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에게 충만하기를, 매일 와서 주를 사모하는 아이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나에게 기도를 부탁한 누구누구에게 충만하기를. 참빛,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면 알수록 저들 안에 풍성하여질 주의 은총을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른다. 조용한 공휴일의 글방 안은 고즈넉하였고 나는 꼼지락거리며 누구를 생각하고 나에게 두시는 이와 같은 이들의 변화를 예의주시하였다.
말도 안 되게, 나 같은 이가 뭐라고 내 덕이란 소릴 다 듣고! 더욱이 순결한 마음으로 더욱 사랑해야 한다니!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요일 2:9).” 더는 어둠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 어둠이 무언가? 미워하는 마음이다. 싫어하던 마음이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3:15).” 누굴 미워하나? 실은 그게 다 가까운 형제였다. 가족이고 친구였다. 말 그대로 남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어디 연쇄살인범이라 해도 저를 혐오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은 미워하는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미움은 실제 늘 내 곁에 나와 상관있는 자들을 향한다. 가까운 사람,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게 미움이다. 차마 유치한 것 같아서 욕은 안 해도 은근히 속으로 꽁하고 있는 마음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치를 떠는, 그래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이다.
흔히 ‘눈엣가시’라는 말처럼 자꾸 눈에 선하여 자주 보이고 밟힌다. 미움이란 참으로 사랑만큼이나 스스로 어쩔 수 없고 감출 수 없는 마음이라, 사랑을 훼방하고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친구에 대한 내 안의 감정이 그러한 게 있다. 또는 지금 오는 아이의 그 엄마에 대한 괘씸한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이게 다 네 덕분이야.’ 하는 소릴 들으려니까 오히려 부끄럽고 송구하고 민망한 까닭은 그것이다. 교회 나가라, 다시 신앙 회복해라, 믿음 안에서 살아라, 말만 그랬지 정말 내가 그 문제를 놓고 고통스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든가 말든가, 그건 다 지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하였던 마음이어서! 그럼에도 주께서 나의 이 말 같지 않은 말과 마음 같지 않은 마음도 들어서 이처럼 귀하게 열매를 맺게 하시니 송구할밖에. 나는 친구가 그렇게 말할 때 또 누가 감사해요, 고마워요, 할 때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이지 나처럼 하는 일도 없이 거저먹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나? 아무리 주의 은혜라지만 자꾸만 송구할 따름인데, 그런 걸 보면 그냥 두시는 고통이 괜한 게 아니었구나! 이와 같은 고통으로 주를 더욱 사모하게 주의 성전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오늘 시편 73편의 말씀에서 더욱 여실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저 친구를 시샘하고 은근히 경쟁하였던가. 저는 뭔 복이 많아서 부모가 물려준 집칸에 건물을 올리고 저절로 건물주가 되고, 그 형이 의사라 이래저래 도움도 많이 받고, 그러니 은근히 배 아파하고 심지어 축하하면서도 미워하던 마음이 내 안에 있지 않았던가? 누가 아이가 그리 되었을 때 안타까워하면서도 잘 됐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심보로 고약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저들은 뭘 해도 잘 되고, 엎어져도 참외밭이더니! 그런 마음보로 있던 나에게 고맙다고 하고 내 덕분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머리로는 잘 알지만 저들을 부러워하고 시샘하다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1-3).” 정작 누구보다 악인이 나였고 오만한 자가 나였다는 것을 이제야 고백한다. 어찌 감히 내 덕분이라는 말을 넙죽 받을 수 있겠나! 내 안에는 늘 불만이 가득하였고 미움이 걷힐 날 없었다. 저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1).” 할 때에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사로 그 애들이 엉망이 되고 저의 건강이 휘청거릴 때면 겉으로는 위로하면서도 속으로는 고소해하지 않았던가? 꼴좋다, 하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던 것 같아 은근히 억울해하기도 했지 않았던가?(15).
공휴일 오후에 교회에 혼자 있으면서 깨달았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 나야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고, 혹시나 하나님이 한 번 변론해보자 하고 나의 지난날을 낱낱이 들추신다면 고개도 들 수 없는 죄인인데! 아,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비록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짐승만도 못한 나를 건지시고 이끄신 이가 오늘 또한 내 곁에서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시는 데 있어 나를 증인으로 삼으시니 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그러므로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오늘 이 고백이 나의 것이 되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비록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6).” 내게 맡기시는 이 모든 날들을 통해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나보다 더 생생하게 경험하고 느끼며 목격하는 자가 또 있을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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