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왕하 21:16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시편 75:1
그런 거 보면 한 영혼이 돌이켜 주께 향한다는 게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 일인가를 알겠다. 결국 연장된 생명도 다하여 히스기야는 죽었다. 그때 그가 남긴 므낫세가 왕이 되어 하나님께 향한 배교는 급물살을 타고 기어이 유다를 멸망으로 이끈다.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왕하 21:16).” 우리의 즉흥적인 기도 또는 일시적인 소원에 대한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 것이다. 병들었거나 무슨 문제가 더했을 때 물론 이를 두고 주께 낫기를 구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기도는 인지상정이나 그보다 앞서 주를 신뢰하는 것이 귀하다. 당한 고통 때문에 오히려 유익이 더 큰 까닭은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동안 베푸신 주의 은혜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둘러 청소를 끝내고 아이를 앉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주로 내 이야기였으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바랐다. 처음 우려했던 것보다 아이는 자발적이었고 하려고 하는 의지도 생겨나는 것 같았다. 다만 나는,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감당할 따름이다. 솔직히 특별한 고통은 없다. 다들 자기 경험이 그때 그 일이 대단한 것 같지만 고통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견주어 서로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은혜는 특별할 수 있다. 백날 그래 봐야 몰라보고 느끼지 못하면 저는 그저 그 정도일 따름이다. 다만 고통은 이를 일깨우고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시 31:9).” 근심을 사서하는 게 또 병이라. 그런데 그 고통 중에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의 감사란!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7).” 나는 아이에게 이를 알려주고 싶어 좀이 쑤셨다. 내 안에 이는 안달을 나는 감사히 여겼다. 이 무슨 조화인가? 오전에 아이가 왔다 가고 오후에 아이가 오고, 하루 일과가 마치 나로 하여금 주만 바라게 하는 것 같다.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저들 영혼의 기갈을 안타까워하며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그 가운데 바동거리면서도 괜찮다 괜찮다하는 아이엄마의 몰골이 나는 딱하다. 자신도 어디 알바를 가고 저는 시급 얼마를 받고 그것으로 아이에게 주라하는데 그게 아니면 그때마다 카드론이라도 쓰려 했다나.
정말이지 ‘고통 없는 지옥’ 같다. 아프지 않으니 됐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게 어찌 괜찮은가. 병 낫기를 바라고 구하여 병이 나았으니 됐다고 하면 그때 얻은 므낫세는 어쩔 것인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말씀을 듣지 못함이 기갈이다. 그럼에도 말씀은 싫고 교회는 멀리한다. 괜찮다, 됐다, 거리를 두고 사양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보내고 있는 것이니, 엄마의 기도가 배제된 아이의 영혼은 바짝 마른 나뭇잎 같아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부스러질 것 같고, 조그만 불씨에도 불이 붙을 것만 같아서, 무슨 이야기 끝에 아이의 동요가 있는 것을 느끼고 말을 돌렸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게 지혜를 주신다. 임기웅변이 아니다. 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생각에 시달린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음은 뭘 해야 하는 거야? 안달하는 내 영혼에 주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나는 어둠에 있지 않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 같지만 내 손을 이끄시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저 바람에 맡긴 돛단배처럼 그 시간에 저와 같이 있을 뿐이다. 형 내일 갈게요! 하고 토요일에 성경공부를 오는 친구에게도, 목사님 잘 다녀올게요! 하고 버스에 올라 직장으로 가는 아이의 문자에도, 선생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하고 온 아이의 답에도 나는 그저 뭉클하여 고개를 들고 ‘생명의 빛’을 본다. 결코 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게 아니었으니, 나는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가 먼저 주께 내어놓을 뿐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내게 짐을 주셨으나 짐이 되게 아니하심은 그 짐을 주께서 지심이다. 내게 이 일을 맡기셨으나 이 일이 버겁고 힘들지 않은 것은 주께서 일일이 일을 다 하시기 때문이다. 아이가 돌아가고 몰려드는 피로감으로 깜빡 잠이 들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났으니 급 피로감이 몰려온 것인데 그 잠이 꿀맛 같았다. 일어나 앉아 교회 통장에서 아이 통장으로 주급 8만원을 보내주었다. 어쨌든 아이가 오면서 글방이 정돈되었고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니, 문득 드는 생각이 큰 교회도 아닌데 이처럼 간사를 두게 하시는 것 같아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어땠는지, 앞으로 어쩔 것인지, 나는 성급하지 않기로 했다. 오게 하신 이가 있게 하시든 가게 하시든 그 모든 일에 계획을 갖고 계심을 신뢰하였다. 분명 주의 뜻은 단호하였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나는 설령 책으로 묶일 만큼의 원고가 되면 선생 출판사로 보낼 것을 묻기 위해 선생과 통화했다. 대략 지금의 상황을 알리니 좋아라하기는 하는데 저이 또한 ‘잃어버린 자’라. 내가 고2 때 저이가 내게 그처럼 마음을 주고 남달리 위했던 것은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인 것을 나는 이제 잘 안다. 한참 교회 청년부에서 열심을 다해 주를 섬겼던 때라. 그럼에도 그의 가난이 또는 그 영혼의 기갈이 결국은 다원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 그 마음을 혼미하게 한 것이라! 같이 어울려 지낼 때는 몰랐는데 하나님이 이처럼 떨어뜨려놓고 난 뒤에야 볼 수 있었다. 저도 주의 잃어버린 양이었구나!
이 일을 계기로 선생과의 관계도 새로 설정하시고 부디 저의 모친이 죽기 전에 저도 더 늦기 전에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모든 생은 기구하고 그 삶은 구구하여서 이이를 봐도 안타깝고 저이를 봐도 답답하기만 한데 정작 저 자신들은 모른다. 괜찮다 괜찮다하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오늘 우리의 환난이 보배다. 저는 오늘의 현상을 보고 그 일에 전념하느라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문제에는 둔감할 따름이다.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시선으로 저는 책을 만들어 팔 궁리를 하였고 나는 그러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하였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조화인가? 쓸모없는 나의 이야기 안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긴다는 게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다 지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것을 아이가 정돈하여 글로 쓰고, 선생이 그것을 편집하여 책으로 묶고, 그러는 동안 성령의 역사는 오묘하게 저들의 영혼을 건드리시며 잃어버린 주의 사랑을 되새기게 하실 것임을. 아이엄마와 그 아빠의 이야기와 언니와 그 곁의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이와 아이의 주변 모든 이야기가 얽히고설킨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모두가 한 줄로 이어져 하나님을 향하게 하실 것임을.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시 75:1).” 늘 외면하던 그 주의 이름이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계셨는지를 저들로 알게 하시기를.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7).”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0) | 2019.10.14 |
---|---|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0) | 2019.10.13 |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0) | 2019.10.11 |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0) | 2019.10.10 |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0) | 2019.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