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전봉석 2019. 10. 11. 05:02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

왕하 20:11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증표로 해시계를 물러나게 하셨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더라(왕하 20:11).” 그러자 저의 병환이 나았다는 소문에 유다의 부강함을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앗수르를 치려하는 바벨론에게 유다의 부국강생을 자랑하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열병식 같은 것이겠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는데 자국의 군사력을 자부하는 교만이 아닐 수 없다. 사람 참, 금세 마음이 또 그런다. 이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주께서 만드시고 더하시고 이루시며 보존하시는 것임을,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74:16-17).”

 

요즘 내가 생각이 많다. 일찍 눈을 떴는데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다. 두서없이 생각은 저 혼자 뒤채면서 잠이 달아났다. 일어나 앉아 말씀부터 끌어다놓고 기도에 잠겼다. 아이 때문이었다가 내 이야기 때문이었다가, 이를 어쩌나싶다가 또는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나는 수시로 주께 구한다. 어느 때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하는 게 아닌 것을 잘 안다. 하나님이 내게 두신 나의 이야기는 결코 허튼 게 하나도 없다. 돌아보면 그 모든 것들이 아주 특별한 은혜였다. 가령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의외로 재밌게 듣느라 30분을 더 있다 갔다. 있는 그대로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 아직 아이는 아이 이야기를 꺼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이 이야기 안에도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좀이 쑤신다. 하지만 서둘 일은 아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나는 조심조심 아이와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일만 시키는 것도 고역이다. 지난 이틀간 책장을 들어 엎어 미련을 두고 있던 책들을 얼추 내다버렸다. 그런데 또 책장을 닦고 책들을 정리하게 하는 일도 못할 짓이다.

 

설교원고를 필사하게 할까? 아버지 성경 강해 원고를 정리하게 할까? 그러자니 건 참 지겨운 일이라, 모처럼 집 밖으로 나온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는 하나님 앞에 생각이 많았다. 그러다 이번 설교원고의 주제가 된 아주 특별한 은혜곧 나의 이야기가 아이에게 들려질 수 있다면! 곧 내가 본 것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내가 들은 것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에 닿았다. 물론 아이엄마의 형편에 따른 것이지만 하루 두 시간 주간 열 시간의 시급을 지급할 능력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딱 그 시간 안에서 무얼 시키고 무얼 해야 한다는 게 나부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그 시간 외의 소요 되는 시간은 계산에 넣지 않기로 했다. 실은 이런 것이다. 나는 아이가 아이 이야기를 글로 썼으면 한다. 그러자니 처음부터 그러라는 게 무모할 따름이다. 싫은 것은 아닌데 막상 하려니까 자신이 없다는 아이의 말에 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하고 들려주었던 나의 이야기에서 말하는 나도 주의 아주 특별한 은혜를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들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

 

이 이른 아침, 히스기야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묵상하다, 나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우린 서로 알바시급 만원의 노동 외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조건을 73으로 정했다. 당장 아이는 글쓰기를 한다고 해서 내게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나 역시 내가 가진 것이 없어 줄 돈이 없다. 그래서 아이 이야기를 가지고 어디에 글을 냈을 때 그 수익이 창출되면 73으로 아이가 7을 갖고 내게는 3을 주기로 했다. 이는 마찬가지로 내 이야기를 가지고 어떤 수익을 냈을 때 내가 7을 가지고 아이에게 3을 주기로 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 재미난 셈법이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글방에 오는 명분이 생기고 나는 아이에게 시킬 일이 생긴다. 아이엄마는 길게 보고 오래오래 아이가 같이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니 나로서는 일석이조다. 나의 기도는 벌써 아이가 주일에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돌아보면 나에게 두셨던 고통으로 내가 손해 본 게 없다. 다윗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31:1).” 저에게 두셨던 그 모질고 험한 광야의 세월이 실은 다 주께 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저의 놀라운 고백은 그와 같은 고통의 시간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쌓아두신 은혜를 받는 길이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19).” 돌아보니 나의 인생 앞에 베푸신 주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저의 고백이 곧 나의 것이었다. 그러니 나의 고백이 곧 아이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그 이야기에 대한 원고는 평생을 안고 살았던 셈이다. 시로 썼다가 소설로 바꿨다가 이를 수필로 쓰기도 하면서, 흔히 첫사랑 하면 그렇고 그런 이야기에서 벗어나 나의 아주 특별한 은혜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으로 글쓰기를 시작하였고 그것으로 더는 글쓰기를 거둬치웠다. 족히 20년은 넘는 세월 동안의 일이다.

 

이를 하나님은 의도하신 것일까? 시편 31편을 묵상하게 되었고, 어쨌든 그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사도행전 64절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어째서 아이를 지금에 와서 나에게 보내셨는지 나는 모른다. 앞서 몇 개월 전에 선생이 왜 채근하며 나의 글을 좀 출판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수차례나 하게 하셨는지 모른다. 새삼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고, 그런 식으로 어디에 이름을 낸다는 것도 불편하였고, 더욱이 몸이 아파서 다시 또 그 지난한 작업을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이제 알바생으로 아이를 보내심으로 기어이 내 이야기를 쓰게 하시려는 것일까? 전의 내가 아니다. 더는 아닌 척 괜찮은 척 할 게 없다. 나는 다만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 그러라고 주님은 새로운 판을 짜신 것일까?

 

생각이 많으시네요, 선생님 그러라고 그런 건 아닌데, 우리 때문에 힘들어서 어떡해요? 하는 아이엄마와의 통화에서 나는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하는 것도 없이 거저 받는 은혜뿐이라, 나의 아주 특별한 은혜에 대해 아이를 통해 저이에게, 그 가정과 콩가루가 된 그 집 식구들에게 들려질 수만 있다면! 나에게 보인 것이 저들에게도 들려줄 수만 있다면! 불현듯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아 히스기야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듯이 나의 이야기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데 아이가 원고를 다시 정리하고 이를 선생의 출판사에 건네고, 어떤 수익이 창출되면 이것으로 아이의 도약에 발판이 될 테고. ,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나는 어제 다윗의 이야기로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 베푸신 아주 특별한 은혜를 그냥 흘려버릴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 또한 내가 억지로 할 게 아니었다. 몇 달 전 선생의 뜬금없는 채근과 더는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닌가보다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아이를 새삼 이렇게 보내시고, 것도 일을 좀 시켜주세요.’ 하는 것이었으니 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다시 다윗의 멋진 방도를 떠올렸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55:22).” 그전의 나의 삶이 요동함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면 더는 흔들리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들린다. 저들은 결코 내 짐이 아니다. 나한테 자꾸 고맙다고 하는데 내가 지고 가는 짐이 아니다. ‘여호와께맡기라! 여호와는 누구신가? 하나님의 본명이고 창조주이며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명이시다. 곧 나를 나로 지으신 이시다. 나에게 아주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내 인생의 동반자이시고 그 주인이시다. 내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러니 이는 마땅히 당연한 소리다. 

 

지난날 내가 이고 지고 씨름하였던 내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가 아이에게 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총과 구원의 이야기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느닷없고 난데없는 아이의 출현과 뜬금없고 기약없는 선생의 제안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실까?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 가운데 오늘의 말씀은 교만 떨지 말라는 소리다. 행여 내가 가진 나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로만 여긴다면, 그래서 누구에게 자랑질하듯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보여주는 일은 끔찍하다(왕하 20:13). 왜냐하면 이는 마치 내가 잘나서 그리 특별하게 산 것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로 들린다.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은혜라. 그래서 나는 다만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는, 그것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명심해야 할 것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03:15).” 나는 생각이 많은데 내 안에는 또한 평안이 있다. 아이가 싫지 않고 오늘의 이 일련의 사태가 예사롭지 않다. 나는 한 게 없는데, 나의 고집불통 친구가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고 성경공부를 같이 할 줄이야! 이 모든 게 주의 것이라.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74:16-17).” 이 모든 게 주의 것이어서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하고 복된 일인지! 나는 아이에게 필연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6:4).” 그러라고 오늘 주께서 나로 하여금 내 주변에 나의 이야기를 늘려가고 계시는가! 이는 곧 하나님의 이야기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74:18).” 저들 인생이 꼬이고 콩가루가 된 것으로 주의 이름을 능욕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나의 기도는 저들이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하심이여, 이로써 주의 은총이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질 수 있기를. 그러므로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21).” 누구는 저 아이를 장애가 있다고 하고, 누구는 저 아이를 이렇다 저렇다 하며 함부로 여기지 않게 하시기를. 왜냐하면 이는 모두 다 주의 것이라! 주가 지으신 바, 하나도 주의 것이 아닌 게 없으심을 저의 대적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23).” 이를 물리치고 바로 잡으시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주의 아주 특별한 은혜로 살게 하셨던 것 같이 아이의 오늘이 어느 가까운 훗날 아이의 입으로 아주 특별한 은혜를 찬송하게 하시기를.

 

이는 모두 주의 것임으로!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