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2:2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한다. 두려움으로 주를 경외한다. 그 남은 노여움은 금하신다. 그 남은 두려움은 금하신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듣고 두려워할 줄 알았다. 주께서 이를 알아주셨다.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 22:19).” 전날에 왔던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더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말에 감사하였다. 벌레가 자기 팔과 몸을 파먹는 꿈에 늘 시달렸다고 했다. 또는 마음을 주고 있는 여성에게 그 나라의 성경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여 구해주었더니 너무 좋아하였다. 형, 저는 두려워요. 혼자 죽을까봐. 무슨 일이 터졌을 때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을까봐. 그래서 전에 다니던 교회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해요. 하는 저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산다는 것은 무얼까? 우리 안에 노여움이 상존한다. 노여움은 두려움의 다른 말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이를 물리치거나 없이할 수 없다. 그래서 저들이 이단이란 걸 알면서도 다시 돌아가고 저들의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저의 고백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누구라도 그와 같은 두려움은 떨칠 수 없다. 가족들이 없다고 해서 두려움이 있고 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보살핌이란 모두 다 한계가 있고 그저 허상과 같을 뿐 정작 각자는 저마다의 두려움을 지고 산다. 이를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노여움으로 주를 찬송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를 바란다.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신다! 이를 주께 맡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침 설교원고를 완성하고 다음 날 저와의 성경공부여서 주일에 앞서 그것으로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주신 ‘아주 특별한 은혜’ 나는 저에게 이를 전했다.
아내가 같이 와서 점심을 먹고 대화를 나누다 갔다. 매주 토요일마다 온다는 것이 어찌 저의 결단이기만 하겠나. 주께서 보내시는 일이라! 우리는 마다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는 데 전념하고 함께 기도하는 곳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나는 이 말씀을 사랑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이는 목사여서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모두의 책무다. 저가 옆에서 같이 일하는 태국 여성에게 마음을 두다 이제는 주일을 권하고 같이 말씀 묵상을 나눈다는 말에 놀라웠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며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여서, 우리 안에 주를 모시고 산다는 일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결코 우리의 탐구와 노력으로 알게 되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공교히 다루는 말이 아니다. 어느새 내 안에 늘 자리 잡은 말씀이고 들려주고 전하여주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성경은 계시라 한다. 계시란 내가 알게 된 게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이다. 상상력이나 꾸며낸 말이 아니다. 그럴 것이란 추측도 아니다. 요시야가 두려워 떨었던 것은 말씀 앞에서였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아니면 이를 어찌 설명하고 이를 어찌 납득할 수 있을까?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것에 감사한다. 저의 열심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지금 그 마음이 주의 것이라. 이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자기 이야기를 말씀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계시다. 아니면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욥 11:7).” 내가 저보다 뭘 더 안다고 저를 가르치고 일깨워 돌이키겠는가!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저가 오면서 나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확실하고 내가 저를 위해 무엇을 행함이 아니고 주께서 저와 나를 행하여 열어 보이시는 세계가 엄연하였다.
고마움 때문에 또는 두려움 때문에 그래서 사람을 보고 사람에게 기대어 교회를 가고 신앙을 붙들고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저에게 말해주었다. 전에는 그 여인을 소유하고 싶고 내 것으로 삼고 싶어서 안달하는 마음으로 주께 구하였다면 이제는 더욱 사랑함으로 그녀를 주 안에서 살펴주고 위로하여 주기를 말해주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련함을 아시고 전도로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저가 오랜 시간을 그 교회가 이단인지 알지 못하고 다니면서 몸에 밴 율법적인 형식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과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고 예배에 대해서도 뭔가 뜨거움(?)을 갈망하였고 그것에 사로잡히기를 바랐다.
가령 저는 조심스럽게 교회를 옮겼으면 한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새로 나가게 된 교회가 찬양이 또는 사람들이 밋밋한 것 같다고도 하고 그래서 그의 안에 어떤 끌림이 덜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전에 교회는 전투적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어떤 게’ 있었다. 돌봄도 거의 필사적이어서 끌어가듯 사로잡았고 성가실 정도로 자신을 붙들어주었다고 하였다. 방언으로 기도들 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게 좋았다고 하면서! 나는 저의 말을 무아지경에 도취된 자기만족 내지는 환각과 같은 충동이라 이해했다. 전에 어떤 아이의 엄마가 무슨 말 끝에 자기 신앙을 소개하면서 자신은 주일 날 예배보다 금요 철야예배가 더 좋다고 하였다. 요는 뜨겁게 찬송하고 다들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마음껏 울 수 있어서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오면 일주일 동안 쌓인 시부모와의 갈등과 안 믿는 신랑에게서 받은 스트레스, 자식들로부터 받은 무시를 한 번에 털어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심정이 어떠한지, 그 느낌이 무엇인지, 마치 어디 클럽에 가서 강렬한 비트에 몸을 흔들며 괴성을 지르고 흠씬 땀을 흘리고 나면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것 같은! 나는 친구에게 그러한 심정은 알겠으나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좀 더 그 교회를 다녀보자. 이제 한 달이 되었고 마침 교인 등록도 하였으니, 저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자.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은 말씀은 좋다고 하니, 이런저런 저의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나는 저를 위로하며 말씀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말씀에 붙들리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이다. 이를 발판으로 사람을 공궤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구제도 헌신도 심지어 예배도 찬양도 모두 이를 앞설 수 없다. 나는 감히 말하기를 하나님보다 앞서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다. 내 위로를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다. 내 안위와 내 평안을 좇아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아니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믿음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의뢰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어린 아이 같다 하면 순수함으로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6).” 다들 어른으로 살면서 자기 판단과 기준을 붙들고 씨름하는 세상에서 우리 안에 두시는 이 무모하고 철딱서니 없는 마음 같으니라고! 이는 우리 의지의 것이 아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감히 꿈도 못 꿀 일이다. 내가 어찌 이렇듯 믿고 바라고 의지할 수 있겠나?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저가 한 시간 반을 운전하여 인천까지 오는 까닭을 안다. 내가 저를 기다리며 저를 권하고 위로하려 하는 마음을 안다. 어찌 그러한 게 인위적으로 될 수 있는 마음이던가? 성경밖에 답이 없다. 말씀에 붙들려야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에게 기대어 사람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다. 저나 나나 우리는 어쩌면 스치듯 지나갈 따름이다. 나는 저가 지금의 교회에서 말씀으로 뿐 아니라 성도의 교제로도 평안하여지기를 기도한다. 단지 저들의 돌봄이 아니라 그 너머 하나님의 깊고 깊으신 사랑을 누리고 나누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토요일 막히는 길을 뚫고 인천까지 왔다 가지만,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우리 안에는 주의 빛이 있다. 말씀이 우리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우리 안의 두려움이 노여움과 같아서 내 위주로 내 뜻을 구하던 것을 버리고 온전히 주의 다스리심이 저와 나와 함께 하시기를. 그 노여움으로 찬송이 되게 하시고 남은 노여움은 금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8).” 이는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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