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
대상 15:29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2
유난히 어렵고 부산한 하루였다. 선생의 권유를 더는 뿌리치지 않고 주의 뜻을 살폈다. 아이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며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은 농락당하고 있다며 억울해하였다. 또는 열두 시간을 자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오는 아이의 무기력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주 앞에 묵묵하였다. ‘모든 것을 기꺼이 다시 생각하는 것.’ 우리의 회개란 편견 없는 검토가 따른다. 주님만 의뢰한다는 일은 얼토당토않은 내 생각을 접어두는 일이다. 즉 ‘깨우침을 주시는 분께 나를 맡기는 것.’ 다시 생각해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꺼이 맡길 수 있는 것.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누구는 주 앞에서 춤추고 누구는 이를 비웃고 마음에 업신여긴다. 원래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그 마음에 업신여겼더라(대상 15:29).” 둘 다 어쩔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한 마음이 아닐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춤을 추는 다윗도, 이를 보며 업신여기는 마음이 먼저 드는 미갈도! 말씀을 되뇌며 어제 하루의 일을 돌아보다 나는 힘에 겨워 주의 이름을 부른다.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고질적인 불안으로 평소보다 약을 더 먹었고, 속이 답답하여서 저녁을 굶었다. 다만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2).” 억지로야 되겠나? 내가 선생을 돌이켜 주 앞에 서게 할 수 없고, 아이를 붙들어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그 엄마의 회개를 이끌 수 없다. 그 정도이면 주 앞에 엎드려 주를 바라며 주께 모두 맡길 텐데… 그게 참 억지로는 안 된다. 그러니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르리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부디 아이가 또 선생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날이 오기까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 내게 두시는 주의 사명이 귀하였다. 저를 위해 이 아이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되뇔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고 힘들었던 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으로 위로를 삼았다. 부모님은 다음 주 월요일에 관상동맥조영술을 해보기로 하였고 누구네 모친은 결국 디스크수술을 하기로 하였다.
모두의 생은 고단하고 그 수고는 끝이 없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이러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께 나아가는 것,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주께 향하는 마음으로 선생의 제안도 뿌리치지 않았고, 아이의 망상도 귀 담아 들었으며, 무기력증에 사로잡힌 아이를 위하였다. 나는 다만 마음으로 빌고 입으로 시인할 따름이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말씀이 가까이 있어 나는 되었다. 다른 것으로는 위로를 얻거나 힘을 얻지 못한다. 샤머니즘과 다를 바 없는 기복적인 신앙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나는 선생의 구구절절 이어지는 말에 일정부분은 동의하였다.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어서 나는 목사다. 은연중에 나의 냄새나 견해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동의한다면 한 번 해보겠다! 하고 조건부로 승낙하였다. 신앙이란 결코 막연한 게 아니다. 저 혼자 싸매고 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도대체 감출 수 없는 냄새 같고 숨길 수 없는 빛과 같다. 단지 내 이야기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하고 누차 거절하다 이처럼 이끄시는 주의 섭리를 살폈다.
우리에게 더하신 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그렇듯 하는 일도 없는 것 같으나 그러므로 주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겠다. 솔직히 나는 저 아이와 같이 있을 뿐 딱히 내가 하는 일은 없다. 글을 쓰고 또는 말을 상대하고 뭐라 권고하고 위하고 주의 사랑으로 보둠을 뿐, 이는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일이다. 내가 어찌 나서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 아이는 결국 잠수를 탔다. 연락이 되지 않아 답답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처지를 두고 주께 간구하였다. 이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주의 말씀으로 저들은 믿을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요 8:30).”
아이가 웃었다. 나는 웃는 아이의 얼굴을 몰래몰래 보고 좋아했다. 열아홉, 한참 꽃다운 싱그러운 나이에 언제까지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하루에 반 이상을 잠에 취해 있을 것이며 나머지 새벽 시간을 게임을 하며 가상세계의 저들과 대화를 하고 이를 위로 삼아 즐거워할 수 있을까? 그 부모가 권위를 잃었고 저들의 방기가 오늘의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러려니 하고 놓아두는 아이엄마나 아빠도 사느라 사는 데 지쳤을 뿐이다. 저녁에 돌아오니 아내가 공부방 한 아이가 부모의 이혼으로 여태 울다 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네 살 때 이혼한 부모 때문에 홀어미와 그 외조모와 함께 살고 있는 아이 옆에서 둘은 친구다. 중2 아이들로 저들은 서로를 위로하지 못한다. 일찍이 부친의 외도로 성인남성에 대한 혐오가 심한 아이는 그릇되게도 그래서 남자를 유난히 밝힌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언가? 들어주고 곁에 있어 우리는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중1 여자아이 하나는 탈모가 와서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저들 부모는 맞벌이라 먹고 사는데 정신이 팔려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다. 다만 우리는 주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주의 제자가 되었으니 족한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나는 그 자유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주께서 이루시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이다. 나는 선생의 원고청탁을 수락하고도 내 이야기 안에서 어찌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것도 일반인을 타깃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부담스러웠다.
과연 우리로 무엇이 자유케 할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진리란 주밖에 없음을.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다른 무엇으로 내가 다가갈 수 있을까? 나 역시 불안하고 두려워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고도 가슴이 답답하여 일찍 누웠다. 선생을 어쩌면 좋을까?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나름의 논리와 주장으로 한없는 말을 쏟아내나 그저 넌더리날 뿐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오리려 내게 단호하시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겔 2:5).” 자 이제, 나는 저들을 상대해야 한다.
스물세 살 아이의 망상은 단순히 병리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다. 열아홉 살 아이의 무기력증은 공연한 시기가 아니다. 그 부모의 무책임과 주를 거역하는 방기로 인함이다. 열다섯 두 소녀의 서러운 눈물은 부모의 이혼과 저들의 방종이 가져온 괴로움이다. 두 남동생을 두고 아이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운다. 또는 네 살 때 다른 여자에게 간 아빠를 증오하며, 남자들을 싸잡아 경멸하면서도 늘 보면 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어찌 봐야 할까? 아내와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할 말을 잃었다. 열일곱 살의 아이는 커밍아웃을 하였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저의 뒤엉긴 가정 이야기를 나는 주체할 길이 없다. 어느 아저씨가 아빠 자리를 대신해서 엄마 곁에서 살고, 아저씨의 친절이 좋을수록 아빠에 대한 미안함으로 위경련을 호소하는 열세 살 아이의 고달픔을 또 어쩌면 좋을까?
오직 주만 바랄 뿐, 나는 내 곁에 전개되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주체할 수 없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벨전 1:12).” 그러했던 나를 섬기었던 주님의 사랑과 그 죽음 앞에서,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3-4).” 우리는 다만 성령이 주신 것을 가지고 주의 일을 감당할 뿐이다. 내게 두신 나의 이야기란 고로 주의 이야기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관한 고백이 될 것이다. 곧 이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러므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곧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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