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
대상 17:26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편 97:10
주의 복을 알지 못하는 일보다 불행한 게 또 있을까? 아이는 새벽마다 게임을 하고 온라인으로 사람들과 통화하며 대화하는 즐거움(?)에 잠을 설친다. 그래서 오후 두 시에 오면서도 밥을 먹지 못한다. 나는 눈치껏 핑계를 찾아 먹을 것을 준비한다. 하라, 하지마라 할 수 있는 사이가 아직은 아니어서 되레 눈치를 살피느라 피곤할 때도 있다. 글은 곧잘 쓴다. 어느 여성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썼는데 나름 신경 쓰고 다듬고 진중하게 정리하여 가져왔다. 그 좋은 재능을 살렸으면 하여 나는 또 눈치껏 핑계를 찾았다. 끝날 때쯤 탁구를 같이 치는데 내가 이기면 글을 한 편씩 쓰기로 하였다. 그럼 또 밥을 못 먹고 오는 애를 굶기기 뭐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내가 김밥을 사놓기로 하였다. 이처럼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것은 주께서 보냈고 맡기셨다는 것 때문이다. 저들의 상한 영혼이 나는 안쓰러워서 말이다. 이 마음이 어디 내 것이겠나?
한결 같은 소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문득 아이가 돌아가고 그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하는 게 아닐 거였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바울의 저와 같은 고백이 오늘 다윗의 고백과 맞닿아 있다.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주의 종에게 허락하시고 이제 주께서 종의 왕조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두시기를 기뻐하시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복을 주셨사오니 이 복을 영원히 누리리이다 하니라(대상 17:26).” 주신 복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쁨이 된다. 마치 밥상 앞에서 즐겁고 기쁨으로 밥을 먹는 가족들의 모습이 어머니의 기쁨이 되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을 누리는 것이 되레 아버지의 행복이 되는 것처럼! 이는 바울의 고백처럼 주님께 영광이 아니겠나?
‘내가 달려갈 길’ 그 길은 주께서 오늘 내게 허락하시는 이와 같은 일과 아이와 마음과 뒤척거림이 아닐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아니면 내가 대체 왜 저런(!) 애를 마음에 두고, 것도 눈치를 살피면서까지 위하겠나? 때론 우습기도 하다. 탁구를 칠 때도 이걸 져줘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아쉽게 질 수 있을까하고 치면서도 생각이 많다. 책을 읽고 메모를 하면서도 언제부턴가는 지우개를 쓰기 시작했다. 나만 보면 되는 메모를 이제 아이가 정서하고 옮겨 적을 때 행여 그 구절과 말씀으로 아이의 마음에 전하여질 주의 음성이 있지 않을까하여서! 나는 이 일이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 짐작한다. 나의 사사로움이겠으나 주의 마음으로 위하고 대할 수 있을 때, 이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한결 같은 마음과 일심으로 다하는 충성이 필요하였다.
사실은 싫증날 때도 있다. 되바라진 아이를 그저 욕하여 돌려보내고 싶을 때도 많다. 무슨 말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횡설수설할 때는, 그런 글을 같이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일도 고역이다. 눈을 맞추고 들어주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이는 맡기신 자에 대한 경외다. 굳이 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왜 꼭 이런 몸뚱이로 살아야 하나싶을 때도, 하필이면 왜 내게는 꼭 저런 애들일까 할 때도. 우리의 충성은 맡기신 자에 대한 존경이다. 아이를 보고는 못한다. 사람을 보곤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때론 눈치 보는 것 같고 때론 빙충맞게 도움을 구하는 것 같으나, 위하고 또 위하여 주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저 아이가 변화되어 그 가정에 구원이 임하실 수 있다면,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 이 고백이 얼마나 사무치는 두려움인가? 정말 나는 한 영혼을 위하는 마음이 그러한가?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이 답을 더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주가 보전하시는 일이다. 저들의 악에서 건지실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악을 미워한다. 악은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는 일이다. 자신의 기호를 선호하고 그 가치를 우선하며, 그리하여 자식이 우상이고 자신이 숭상의 대상이 되어 커밍아웃을 하고 그릇된 향락에 사로잡히고는 하는 것인데, 저만 악한가? 나는 내 안에 수시로 드는 악함에 대하여 환멸 한다. 나의 달려갈 길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은 데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나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 나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아이가 주일에 나오기를 간구하면서도 정작 아이가 나올까봐 생각이 많아졌다. 죄를 죄라 말해주어야 하는데 죄를 죄라고 말할 때 그 죄를 옹호하는 아이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그것이 죄이면 이것은 죄가 아닌가? 정작 가장 무서운 죄는 저를 비판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나는 내 안에 이는 말씀 앞에 굴복하였다. 저 아이의 커밍아웃이 개탄스러워 한심해하고 저들 부모를 욕하고 그 형제를 비난하던 마음이 송구하여졌다. 그러니 나는 온전하였던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말씀 앞에 나는 좌절한다. 이는 도무지 내 의지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굴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질 것인가?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내게 이루시는 주의 날들이 그러므로 새삼 복되게 다가온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시 97:11).” 내가 아니라 뿌리시는 이의 마음이고 빛이다. 내 것을 가지고 누구를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그러그러한 마음을 고백하였다.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가 10만원씩 후원헌금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를 없다 생각하고 모으기로 했다. 이제 겨우 30만원이 모였다. 한 알의 씨앗이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묵묵히 나아가는 이 길이 바울이 말하였던 달려갈 길을 다하는 게 아니겠나?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 97:12).” 다른 데 없다. 그저 무던하여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나는 친구에게 우리 교회로 오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누구더러 가까운 데 나아가라 일렀다. 우리는 다만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이면 족한 것이다.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더는 충성을 다하기 어려워진다. 주만 바라고 가는 길이란 ‘없다 생각하고’ 묵묵히 준행하는 것일 뿐이다. 어느 훗날 우리는 이 모든 일을 기억도 못한다. 그런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나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름 한다고 하면서 한 것을 곧이곧대로 다 기억하고 있으면 저런 자가 내 자신이 아니겠나?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이 아이를, 저 친구를, 이런 지경에서도, 저런 상황에서도 하는 식으로 낱낱이 고하며 스스로의 공로로 삼을 텐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실 때의 그 황망함에 대하여 나는 두렵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부디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기를! 주께서 내게 더하시는 말씀이고 마음인 것을.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영예에 대하여 이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주께서는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대상 17:18).” 이는 곧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을 위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이 모든 큰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18).” 그러므로 나는 저의 고백이 내 것이기를 바란다.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20).” 이는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시 97:9).” 그러므로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11).”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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