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대상 16:10-11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시편 96:6
기도는 는다. 할 기도가 많다. 아이의 일로 그 아버지와 만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을 주셨다. 넌지시 물었더니 아이가 의외로 좋아한다. 설치며 먼저 아버지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젠 말을 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아이엄마가 알면 한바탕 소통이 일 텐데….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형이나 그 아빠의 지지와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여전한 미움과 환멸로 용서할 수 없고, 그러한 감정으로는 주를 온전히 바랄 수도 없다. 그러니 늘 자신이 알아서 한다고 하고 그 짐을 혼자 지고 죽을 고생이다. 큰애 인생에 둘째 애 일로 짐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그게 그런가? 자기 하나로 그 고생은 끝났으면 한다는데 그게 또 그런가? 어찌 됐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아이에게 운을 뗐더니 아이가 덥석 아빠에게 연락을 넣은 것이다. 다음 이야기를 알 수 없어, 기도밖에는 감당이 안 된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역사하시고 주관하신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오전은 늘 새롭게 지나간다. 오후께 친구가 왔다. 친구의 방문 예정으로 ‘알바소녀’는 글을 한 편 쓰는 것으로 대체하고 오지 않았다. 모처럼의 반가운 만남이었다. 주를 영접한다는 게 한 인간을 어찌 온유하게 만드는가를 하루 종일 느낄 수 있었다. 처가에 대한 언사가 달라졌다. 말을 듣는 태도도 바뀌었고, 무엇보다 성경을 바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저의 얼굴까지 평온하게 하였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이며 불변하다. 우리로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고자 하심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그러니까 저는 늘 자신의 주장과 생각이 우선이었다. 한데 어린아이 같이 된 것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이는 공연한 말씀이 아니었다. 실제 자신은 어린아이처럼 알지 못하고 능력이 없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걸 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서 보았다. 다섯 시간이 넘는 동안 나는 우리의 예정됨과 택정하심에 관하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를 들려주고 설명하였다. 아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은 애 때문에 아내도 그렇게… 하고 친구는 말을 흐렸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그리 단순하면서도 오묘하였다.
우리는 단순히 사교(邪敎)가 아니다. 개인의 근심과 걱정으로 주를 찾았다가 주의 바라심과 기뻐하심을 구하게 된다. 나의 영광을 도모하였다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어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다윗은 증거하는 것이다. 곧 우리는 비로소 두려워 떨 줄을 안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30).” 주의 존엄하심과 장대하심 앞에 무릎을 꿇는다. 천하의 내 친구가 겸손하여져 주의 말씀 듣기를 청하였다!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26).” 늘 보면서 목사도 먹고 살아야지 그러고 있으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하는 식으로 말을 퉁명스럽게 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고백하였다. 이제 슬슬 나이도 들고 죽음을 맞아야 할 텐데, 어머니마저 돌아가지고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하는 저의 말이 재밌었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27).” 주의 능력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대화였다. 물론 이제 시작이라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면서 아내와 같이 글자 큰 성경을 사러 갈 거라는 둥 남전도회에 소속이 되었는데 그들과의 교제가 유쾌하다는 둥 하는 소리에 나는 놀라웠다. 내가 아는 그는 그럴 위인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살고 죽지 못해 일하는 것처럼 늘 불평불만이 가득하여 아내 말만 나오면 투덜거리기 일쑤였고, 말씀을 전하면 그렇게 떡 타령을 하며 먹고 사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너머의 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데 마음이 가면서 그동안 들었던 말씀과 그래도 자주 접하였던 하나님 앞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저의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있다. 그 모든 것보다 우선이었던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어느 날 우연히 아내 손에 이끌려 다시 가게 된 교회 때문이 아니다. 둘째 아이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그 엄마가 어머니회 기도회에 참석해서 생겨난 일이 아니다. 결단코 우연이 아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눅 1:68-71).”
예로부터 이미 증거된 일이다. 구약의 약속이며 신약의 보증이다. 우리는 이제 담대함으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개개인의 구원을 입은 것이다. 나는 친구에게 대언자가 필요치 않고 속죄의 또 다른 희생제물이 없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원죄만 용서 받은 것이냐 할 때 앞으로 네가 지을 죄까지도 용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럼 이제 죄를 짓고 살아도 되냐고 묻고는 친구도 황당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수 없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거나 처음부터 믿는 게 다른 것이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7).”
우리에게 향하신 그와 같은 용서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하신 용서다.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제물도 되셨다. 스스로를 죽여 그 피로 속량하신 용서다. 이를 믿고 안다고 하면서 앞으로의 죄까지 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에 죄를 도로 지을 수 있겠나? 다시는 안 그러려고, 더는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면할수록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죄 가운데 놓이는 자신을 괴로워한다. 마음으로 또는 몸에 밴 습관이 나를 자꾸 죄로 이끄는 데 있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 날마다 애통해하며 어린아이처럼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이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다. 잘하려고 하면 더 주께 부끄러움뿐이니! 친구는 나의 설명을 이해했을까?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 여전히 그 죄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니, ‘날마다 죽노라.’ 하는 바울 사도의 절규를 전해주고 싶었다.
이 일은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이라. 언약은 하나님의 권능에 토대를 둔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 18:13).” 우리는 가망이 없다고 할 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 나는 친구와 대화하며 즐거웠다. 나 역시 하나님을 말하고 노래하며 저가 나의 삶에 어찌 개입하고 계신지를 자랑하는 일은 즐거웠다. 이는 찬송이다. 못 견디겠는 것이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계속 하고 싶은 자랑이 찬송이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요즘 재미를 붙인 골프에 대해 설명하느라 못 알아듣는 내게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을 나는 돌이켜 내가 아는 복음과 말씀을 너에게 그러한 마음으로 설명한다. 그리 일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대상 16:34).” 참으로 놀랍고 기묘한 일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30).” 어찌 저 친구가 주를 바랄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친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을 바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시 96:1).” 나의 노래가 늘어간다. 기도가 는다. 할 말이 더 많아졌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2).” 같이 있는 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두 시 반에 왔다가 여덟 시에 돌아가기까지 친구와 이어지던 말과 말은 나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였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4-5).” 이를 내가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다만 여기 있을 뿐이다.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6).” 그러므로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9).”
곧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1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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