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대상 21:1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편 101:2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를 기본 전제로 삼고 사는 일은 귀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여기며 사는 일 또한 기본적이다. 표준과 기준은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칠만 명을 죽이셨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하였다. 국력을 확인하려는 의도였으나 이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마음’일 수 없었다. 사무엘서에서 이 내용은 기록되어 있다. 다윗의 범죄다. 이는 훗날 주의 성전 건축을 위한 토대가 된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의 범죄까지도 선으로 바꾸신다. ‘사탄이 일어나’ 일을 도모하였다.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자신의 국력을 점검하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내가 주를 바람은 그 완전한 길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여러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어머니의 심장 조영시술이 있었고 주의 손길로 모든 게 다행스럽게 이루어졌다. 오후께 아이 앞에서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등짝이 아픈 고통을 느끼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일에 나오라는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주일에 오지 않은 아이는 화요일이 되어 능청스럽게 글짓기를 하러 왔고 나는 연거푸 지혜를 의뢰하며 엄연한 선을 그었다. 이처럼 하루만 봐도 생(生)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주신 날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지혜이다. 평생의 수고는 우리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8:11).” 응당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잘만 사니,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12).” 이래도 저래도 같은 것 같으니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3).” 우리는 그 결과를 안다. 보지는 못했어도 안다. 또는 알지는 못하여도 보인다. 알고 보는 일에 있어서 어째서 내 마음에 그리 두시는지 때로는 이 믿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러니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14).” 세상을 보면 그저 허망할 따름이라.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처럼 여겨진다. 그 끝은 일반이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9:2).” 그러니 안 믿는 누구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 저의 반박이 들어오면 뭐라 변론하기가 궁색할 따름이다.
즉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3).” 어차피 죽음으로 그치는 일이 인생이라면 더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저녁께 온 아이에게 나는 너를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너를 믿지 않는다. 너는 나를 믿니?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나도 나를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이지 못하면, 나는 너에게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어쩌면 모진 말이었고, 미안한 일이지만 정중한 거절이었다. 아이는 교회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싫어했다. 그러면서 글방을 원했고 나를 좋아했다. 나는 이에 선을 그은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래서 아직 살아서 산 것에 대하여는 소망이 있다. 모든 사람중에 소망이 있다. 생을 포기해도, 우울해도 안된다. 살아있다는 게 대단한 소망이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5).”
나는 부디 아이가 주를 바라고 함께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유용하다. 저나 나나 살아서 산 것의 유용함은 거기에 있었다. 갑자기 등짝이 아파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아이가 올 때가 다 됐고 나는 순간 이를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휘말렸다. 참다못해 아이에게 등짝에 파스를 붙여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꾸부정한 자세로 앉아 너스레를 떨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사촌 동생도 무기력증에 의한 은둔형이란 소릴 전에 전해 들었으나 아이가 말할 때는 모르는 척 하였다. 그 아이를 데리고 지난 주일부터 서울 서초동에 있는 모 큰 교회로 가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이엄마가 태워다주고 이모가 같이 동석을 하는 자리였다. 그리 하면 얼마의 용돈을 받는 모양이고, 좌우지간 아이가 교회에 간다는 소식에 반가웠다. 무슨 이야기 끝에 동생과 같이 우리 교회로 왔으면 한다고 하는 아이의 말에 나는 선뜻 그래라 마라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이 풀려 아이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선생의 제안에 아이와 함께 공동작업을 제안하게 되었다.
이 모두는 주의 섭리다. 나는 그 뒤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가움은 곧 두려움과 같이 왔다. 그럼 저 아이가 교회로 올 때 사촌아이도 같이 오게 되고, 평일에도 같이 움직이게 될 텐데 과연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못하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대체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나? 어머니 병원에라도 가보고 싶은데 그나마도 못하는 주제인데, 내가 어찌 한 영혼을 감당하며 건사할 수 있겠나? 그래서 나는 누구를 거절하였고 누구에게는 제안하였다. 그 기준은 말씀이다.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데 내가 어쩔 것이며, 어찌됐든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는 중에는 어떤 도우심이 반드시 있을 것을 믿는다. 여기까지 온 것도 모두 지어낸 이야기만 같은데, 하루 동안에 벌어진 나의 사소한 이야기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그 배후에서 주도하고 계시는 거였다. 아이가 돌아가고 거짓말처럼 등짝의 통증은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본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결국은 청결이다. 나는 할 수 없는 엄청난 조건이다. 하나님이 하실, 하셔야 하는 일이어서 나는 더욱이 거절도 배운다.
저녁께 그냥 돌려보낸 아이에게 미안했다. 솔직히 마음도 안 좋았다. 그냥 할까? 하다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는 나의 마음이다. 측은지심이지 안쓰러움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아이였다. 나는 너를 믿지 않아! 너는 나를 믿니? 나는 나도 믿지 않아! 어찌 이런 말을 아이에게 할 수 있었을까? 그저 감정으로 이끌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고 들음이 복이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나는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산다. 이로써 청결하게 된다는 것은 내 의지나 나의 노력에 의한 게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나는 바울의 이 기도가 나를 위한 것임을 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내 안에 두사 나의 마음이 주의 마음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마음의 눈을 밝혀 그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내 곁에 보내시는 아픈 아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주님께 연결하는 ‘성도 안에서’ 주의 기업이 되길 기도한다. 그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심으로 나를 내어드리는, 이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확신한다. 비록 내가 한 아이의 속보이는 요구를 거절하였으나 주의 은총이 부디 저와 함께 하시기를! 그리하여 내 안에 갈리는 두 마음을 제어하여 주시기를. 나는 아이를 위하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한다. 저 아이를 사랑함이 아니라 주를 사랑함이다. 이를 위해 내 손을 가까이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나님이 내 발의 등불이시다. 이를 위해서도 바로 보는 눈을,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 11:34).” 고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12:35).” 이에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11:36).”
부디 나의 하루가 주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또한 새로운 제안을 한 것이 너는 너의 이야기를 쓰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우리의 이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드러나기를. 순간 아이에게 제안한 이 지혜가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러지는 것이기를. 주여,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일찍 깨우시고 주 앞에 앉아 나의 나됨을 아뢰게 하시는 주님께,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당연히 나는 못하겠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이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6).” 우리가 함께 나아갈 그 길로 우리가 하나 되어 교회를 이루며 걸어갈 수 있기를.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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