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전봉석 2019. 11. 7. 07:00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

대상 22:5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편 102:18

 

 

날마다 은혜가 새롭다. 매순간이 은혜다. 지난날의 은혜로 사는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색다르고 남다르다. 그때마다 감사할 것뿐이다.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대상 22:5).” 오늘의 은혜는 결국 장래를 위함이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02:18).” 말씀 앞에 묵묵히 앉아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나의 하루를 돌아본다.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산다. 이때 예수님의 의문의 말씀이 생경하게 들린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5:6).”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4:25).” 이는 저가 보이시는 이적과 표적 때문이었다.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24).” 나는 선생이 원고를 청탁할 때 몇 번을 사양했다. 그러다 저의 말 하나에 동감하여 수락했다. ‘목사가 공황에 걸렸다.’ 저마다 기도하고 믿음을 갖고 교회를 가고 신앙생활을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줄 아는데 따른 반어적인 표현이 들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행복을 바라였다. 예수님은 저들을 향해 모호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던지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제자들이 그 앞에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갈구하는 심정으로 그 앞에 있었다. 예레미야의 증언과 같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15:16-17).”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하는 표현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심정을 가늠한다. 주리고 목마른 심정에 대하여는 오전에 오는 아이와 오후에 오는 아이에게서 늘 애타게 느낀다. 아빠하고 혹시 연락하셨어요? 아이는 그렇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마음이 어려운 아이에게서 나는 주리고 목마른 심정을 읽었다. 오후에 오는 아이는 자신이 글을 쓰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데 따른 수입이 얼마일까를 먼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같이 글을 써보자는 말에 그와 같은 반응은 의외였다. 공부를 하거나 무엇을 준비하는 시기여야 옳았다. 이를 포기하고 있다 보니 아이엄마처럼 돈벌이에 우선하여 생각이 미치는 모양이었다.

 

실망보다는 안타까움이 컸다. 안타까움보다는 다음 이야기를 가늠할 수 없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가장 큰 벽은 아이들 엄마이겠구나! 우리는 모두 주리고 목마름으로 산다. 행복을 위해 돈을 추구하고 건강을 바라고 더 나은 삶의 질을 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배부를 것이라 했다. ‘복이 있나니하실 때의 복은 사람들의 행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을 지칭하는 말씀이다. 가난하면 행복할 것이다. 슬퍼하면 행복할 것이다. 온유하면 행복할 것이다. 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돌려서 말하면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데 그 행복을 누가 빼앗을 수 있겠나? 슬픈 데도 행복하다는데, 핍박 받으면서도 행복하다는데 그 행복을 도대체 무엇이 앗아갈 수 있겠나?

 

맹자는 말하길 인생의 행복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 하였다. 어쩌면 솔직한 말이다. 한데 이 모두를 성경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하였다. 세상이 주는 행복으로는 헛될 뿐이라는 소리다. 이 세대는 멸망 전의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 이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이 보여준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1:7).” 나는 아이의 글에서 천국도 보고 지옥도 본다. 그 주리고 목마름에서 말할 수 없는 심령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이에게 글쓰기를 권하는 게 갑자기 부담스러운 일로 다가왔다. 설령 우리가 글을 써서 출판을 하게 된다 해도 이를 수익으로 잡으려면 그 시간은 묘연한데 시급 얼마, 일당 얼마로 당장 계산하려는 아이의 셈법이 안쓰러우면서도 씁쓸하였다. 그만큼 그 생활이 주리고 목마른 것이겠다. 그 부모가 살아온 세월이 돈에 찌들고 돈에 시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일부러 그 답을 회피했던 것이다. 조급하게 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 저녁에 아이가 글을 올렸다. 처음 쓰는 자기 이야기인데 너무 적나라해서 나는 아찔하였다. 정신과 약을 다 털어먹었고, 손목을 그었고, 응급실로 실려 갔고, 그 옆에 차례로 엄마와 아빠가 면회자로 들어와 앉아 있던 이야기를 덤덤하게 적었다.

 

이걸 또 어찌 이해해야 할까? 그저 나는 소소한 이야기로 시작할 줄 알았는데 한 방에 강펀치가 날아든 격이다. 다 저녁에 누워서 아이 글을 읽고는 내내 마음이 어려워서 볶였다. 우리 모든 심령은 주리고 목마르다. 예수님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를 것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는 하나님의 의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는 의이다. 아이가 기워내는 말들이 어둠을 토해내는 것이기를 기도하였다. 나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해주시기를. 빛과 어둠은 결코 같이 할 수 없다. 복음 외에는 길이 없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살라고 하신다. 아이들을 대할 때면 나는 자꾸 목이 탄다. 몸은 경직되고 긴장은 몸의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주의 능력을 바란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의 약한 데서 머무시는 주의 능력이라니! 다시 살리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가망이 없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아빠의 연락을 은근히 기다리는 스물세 살의 아이에게 나는 무엇으로 답을 해야 할까? 아이의 말과 글을 듣고 읽는 일은 고단하다. 멀리 서서 풍경을 보듯 그 의미를 가늠해야한다. 다가가 나무의 줄기와 나이테를 더듬을 수는 없다. 이 말인가 싶어서 다가가면 저 말을 하고 있으니, 주의 지혜가 아니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전날에 그렇게 돌려보낸 열여섯 살 아이로 인해 내내 마음을 졸였다. 안 됐고 미안한데 어찌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다. 나의 이 주리고 목마름은 주의 위로로만이 해갈될 수 있다. 복음으로 오는 의이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아이, 그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자기 이야기 앞에서 나는 순간 겁을 먹었다. 이래저래 앞서 다 듣고 있어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이를 본인 입으로 진술하였고, 나는 이를 대놓고 이제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서로 다 보통 용기가 아니다. , 이제 나의 다음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나의 이러한 마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었으면 좋겠다. 실은 늘 자신이 없어서 내가 저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는 걱정이 또는 염려가 늘 나의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은혜 아니면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다. 이런 나를 위하여, 자기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이의 의에 주리고 목마를 따름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그러니 주밖에 어디서 나의 이 갈급함을 호소할 수 있겠나?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102: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