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 28:9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시편 108:6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주를 섬긴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말씀 붙들고, 말씀에 붙들려 사는 생(生)이어야 한다.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벌레도 아니다. 종종 건물 여기저기서 바퀴벌레를 본다. 문득 드는 생각이 저것들에게는 여기 이 건물이 전 우주이고, 그 생은 번식하고, 먹고, 싸고, 빛을 피해 어둠 속에서 숨어 사는 것이겠구나. 그저 태어났으니까 살고, 사느라 사는 것이겠구나. 그것이 저것들에게는 전부이겠구나. 하지만 우리 사람은 그렇게 지음 받지 않았다. 저것들처럼 살라고 이 땅에 보내신 게 아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면서 저것들과 다를 바 없이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먹고, 싸고, 쌓고, 번식하고, 누리다 가는 것으로 그 생이 전부가 된 게 아닌가?
오전에 오는 아이와 시편을 지나 잠언을 한 장씩 묵상하고 있다. 어제는 ‘어떻게 하면 가장 고귀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데 생각을 가져다두셨다. 이는 먼저 “인자와 진리를 떠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3:3).” 그러기 위해 이를 ⓵ 목에 매라. 그리고 ⓶ 마음판에 새겨라.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나?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5).” 이는 ⓵ 마음을 다하는 것과 ⓶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그러면 ⓵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⓶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않는다. ⓷ 악을 떠난다. 비로소 ⓸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공경한다. 이에 주께서 아버지처럼 행하시는 꾸지람을 가벼히 여기지 말라는 것,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11).” 이를 ⓵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신다. 그것으로 ⓶ 지혜와 명철을 더하신다.
그러면 이에 비교할 수 없는 결과를 약속하셨다(15-18). 우리의 ⓵ 오른손에 장수가 있다. ⓶ 왼손에는 부귀가 있다. ⓷ 그 길은 즐겁다. ⓸ 지름길에도 평강이 있다. 곧 ⓹ 그의 지혜는 생명나무 같다.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메모하며 아이와 같이 읽었고 이에 따른 메모지를 오후에 오는 아이는 ‘이런 내용’을 정리하였다. 나는 오늘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전하는 말씀을 그리 정리한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산다. 그저 바퀴벌레 같은 인생이 아니다. 우리는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주를 섬길 때 비로소 사는 일답게 사는 것이다. 그럼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주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게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시 108:6).”
실제 우리의 마음은 늘 한 다리 건너라, 내가 저 아이를 생각하고 주의 마음으로 위한다고는 하나… 다섯 시가 넘어 여섯 시가 다 되었을 때 나는 아이가 안 왔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차라리 잘 됐다, 하고 있었다. 그렇듯 누구의 슬픔은 한 다리 건너에 있다. 내 몫이 가장 크고 무겁고 아픈 법이다. 한 시간이나 늦어서 아이가 왔다. 목요일에 있을 수능 때문에 사물함을 다 비워야 해서 이를 집에 가져놓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했다. 주일에는 어땠는지 묻자, 어색했다고만 대답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준비했던 빵과 음료를 내놓으며 먼저 기도를 했다. 그리고 예수 앞에 나아온 많은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조차 처음에 다들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잠깐씩, 성경 한 장씩을 가지고 아이의 글에 대해 말하기 전에 이야기하기로 하였다. 싫든 좋든 별 수 없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색해도 어쩔 수 없고 거부감이 일어도 별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의 최선이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되는 비결이 있다. 곧 우리의 슬픔으로 우리의 인내가 만들어진다. 그 인내는 인격이 되고 비로소 우리의 인격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어떻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느덧 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 이는 ⓶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의 슬픔까지도 사랑하게 한다. 즉 ⓷ 내 곁의 이 지긋지긋한 일상도 감사하게 한다. 감사는 종종 아이러니하다. 감사할 수 없을 때 감사가 나온다. 나는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요즘 부쩍 안정제가 늘었고, 기도가 필요하다고 아내와 딸에게 부탁하였다. 풀리지 않는 긴장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가지고 선을 도모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이게 그렇듯 저절로 된다(고전 13:4). 아이가 늦었고, 또는 안 왔으면, 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를 두고 기도하고 있었다. 아이가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고맙고 기특하였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4-5).” 결국은 남을 위해 부대끼는 마음조차 감사하게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이는 결코 나의 의지가 아니다. 아이의 글을 읽으면서 그 전해져오는 칙칙함과 우울감으로 몸서리치면서도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이는 결코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하기를 제일 계명으로 치셨는지 알 것 같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만일 이웃 사랑이 먼저였으면 우린 못한다. 나는 싫다. 저 애의 음흉함이 싫고 그 무거운 표정이 싫다. 늘 징징거리는 듯한 저의 글이 싫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싫다. 그럼에도 주가 저 아이를 사랑하신다는 것. 어떠하든 저 애를 보내시는 게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 애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하지 않겠나?
성경이 일컫는 사랑 방식은 놀라울 따름이다. 머리로는 이해도 할 수 없다. 듣는 것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런데 못하겠다. 못하겠다하면서도 정작 아이가 오니까 내 안에 생겨나는 알 수 없는 반가움과 고마움과 사랑스러움이 놀라웠다. 어깨를 토닥여주고 잘 참고 견뎌내자, 하면서 아이를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배웅하고 돌아올 때의 알 수 없는 기쁨이라니! 성경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환난과 시련이 넘치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내게 한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게 하셨다.’ 나는 문득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에 대하여, 그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게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일인 것을 알았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넘치는 기쁨이 사랑이다. 이것의 실제는, 참된 행복은 이웃사랑하기를 요구하였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아, 주의 말씀이 곳곳에서 지표가 되시는구나. 결국은 긍휼을 베풀 때 참된 즐거움이 있었다.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이것으로 우리는 고달픔도 달게 받는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 10:34).” 이 기쁨을 알게 하신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고후 2:3).” 그리하여 즐겨 낼 수 있는 자가 되는구나(9:7). 우리의 기쁨이 다른 이의 기쁨도 되는구나(2:3). 이를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구나(벧전 5:2).
왜냐하면 내 안에 기쁨을 맛보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이 우리의 영혼을 경성하기 때문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결국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이 사랑이었다. 고통을 이기는 기쁨이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그 기쁨은 확장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였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 그래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단언하시는 것이구나(롬 5:3).
이는 우리에게 주신 복이다(행 20:35). 우리는 모두 죽지만 죽지 않는다(눅 21:16-18). 영원히 산다(요 11:26).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상이 크다(마 5:12). 왜냐하면 이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맛보아 알게 하신다(히 12:2).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는 요즘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희한한 일이다. 근심을 하고 있는데도 기쁨을 누린다니! 근심이 다 지나가서가 아니라 여전하게 근심이 나를 불안하게 하고 심지어는 안정제를 늘려 먹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더욱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아,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이는 최종적으로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확신하였구나.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고후 2:3-4).” 이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누리는 참된 기쁨을 맛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시 108: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권능의 날에 (0) | 2019.11.15 |
---|---|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0) | 2019.11.14 |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0) | 2019.11.12 |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0) | 2019.11.11 |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0) | 2019.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