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전봉석 2019. 11. 11. 07:01

 

 

모세의 아들 게르솜의 자손 스브엘은 곳간을 맡았고

대상 26:24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시편 106:2

 

 

오늘 본문은 각기 그 맡은 바 성전 문지기, 곳간 관리와 봉사자, 행정일 등을 맡은 자들을 나열하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106:2).” 하는 말씀으로 압축된다. 이 모든 일들을 맡아 주관하시는 이가 전능자 하나님이신 것을, 그에 대하여 말씀이 주는 교훈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하는 것이다. 우리로 보고 알게 하신다.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5).”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저들로 인해 그 가정이 구원 받고 그 가정이 잘됨으로 주의 나라의 기쁨이 전파되기를 구한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아이가 왔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뚱해 있는 아이의 모습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차라리 저럴 거면 오질 말지, 하는 생각이 힘들게 하였다. 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어려움을 두실까? 버젓이 그 고통을 도드라지게 하실까?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결국 아이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속이 불편하다며 일찍 돌아갔다. 그러니 다들 어려워하며 쩔쩔맸다. 속상하고 화가 났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는 마흔넷이나 되었으면서 사춘기 아이처럼 말끝마다 누구 이야기를 하며 그에 따른 속앓이를 호소했다. 다 저녁에 들어온 저의 문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야말로 자꾸 속이 울렁거렸다.

 

보내실만하고 들을만하여 주께서 그리하시겠지, 생각하지만 모두 돌아가고 스물네 살 아이와 둘이 남아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우리의 하나 됨은 주의 보혈뿐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아이가 싫어해도 어쩔 수 없다. 주중에 오면 성경공부를 할 생각이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 또한 어쩔 수 없다.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저의 칭얼거리는 소리를 계속 들어줄 수는 없다. 기껏 말씀으로 권하고 몇 번을 말하여도 여전한 것에 대하여 내가 먼저 진이 빠질 노릇이다.

 

아버지가 하실 일이다. 나에 대한 기도를 아이에게 부탁하듯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다른 수 없다. 내가 어찌 잘해서 될 일도 아니다. 주께서 하셔야 할 일을 내 마음이 앞서 동동거리는 까닭은 나 역시 기도하라 하시는 일일 테고, 다만 내가 저들을 책임지려해서는 안 된다. 보내신 이가 맡을 힘도 주시고 그 위함도 더하실 것을 믿는다. 다짐하듯 그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나는 지치고 말았다. 평온한 주일 오후에도 여느 때보다 안정제를 더 먹으며 마음을 달래야 했다. 싫은 것이다. 저 아이의 골난 표정도 싫고 그 속셈도 싫다. 누구의 구질구질한 마음이나 여건도 싫다. 부담스럽고 답답하여 마음이 자꾸 어렵다. 그저 그러려니, 또는 그럴 바엔 오지마라, 하지마라 하고 싶은데. 내가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복음으로만이 승부를 걸자. 싫든 좋든 교회고 잘하든 못하든 나는 목사다. 곧 이 복음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9-10).” 만일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도달한 일이면 나의 경험이나 지식이 유용하겠으나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일하지 않았고 경건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줘야 하는 일이지만, 나는 힘에 부치는가.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3:36).”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그저 무던하게 주 앞에 오고 말씀 앞에 앉기까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행위로는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다만 주만 바란다. 미리 예정하신 것을 또한 이루시는 것임을 믿는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5).” 이는 값을 주고 사신 것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5:9).”

 

이에 우리로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3:29).” 저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나야말로 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속상하고 답답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감당할 수 있겠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2:12).” 그러니 새로운 목적이 생겼다. 아이로 말씀 앞에 세우자. 떨어져나가면 어쩔 수 없다. 성경공부를 강행하고 내년 이맘때는 세례교인으로 세우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6:5).”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고 그래서 교회가 자신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하는 열여섯 당돌한 아이를 내가 무슨 수로 감당하겠나? 뭘 알기나 알고 말하는 것인지, 그저 치우쳐 자신도 그 마음을 모르고 하는 짓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3).” 죽으나 사나 말씀으로 승부하자. 나는 아이에게 대놓고 예배에 오는 것과 성경공부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 다음이 논술이고 인간관계고 사춘기 소녀의 되바라진 모색이다.

 

나는 저들 꿍꿍이를 대신 질 수 없다. 이는 나로 하여금 나의 연약함을 수시로 알게 하시는 이의 뜻을 그리 이해한다. 마치 내가 누굴 낫게 할 수 있거나 그 인성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또한 내가 누구에게 고마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엄연히 금하시려고! 나로 수시로 찌질하기 이를 데 없게 하시고 궁색하고 어눌하기 짝이 없게 하신다. 하나님이 그리 두신다. 나는 나의 모자람을 그리 이해한다. 이는 바울의 논조다. 나의 연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누구보다 한심하고 모자란 내게 그와 같은 이들을 붙이시는 덴 다 그만한 은혜가 있을 거였다. 오후 두시의 아이에게 오늘부터는 무슨 일을 시키나? 토요일에 오는 친구에겐 뭐라 말을 해야 하나? 뜬금없이 커밍아웃을 하고 글쓰기를 봐달라고 하는 속이 빤한 꿍꿍이의 소녀에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중심을 잡아야 할까? 늘 하나마나한 것 같은 스물세 살 아이에게는 또 어쩌면 좋고?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데, 알게 모르게 그 엄마들과 결부되고 가정의 문제까지 이어지게 되는 일이었으니! 나는 혼자 베란다에 앉아 허리를 흔들며 덜덜이를 하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안타까움인지, 하기 싫은 마음인지, 부담스러움인지, 내 몸이 고달픔 때문인지 나는 도무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내 안에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시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누구에게 말하기도 곤란하여 공연히 생색을 내는 듯하고, 또는 구질구질하여 터무니없이 말만 길어질 게 빤하고, 내가 더한 것이어서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14:30).” , 이 믿음 없음에 대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35:25).” 내가 주께 아뢰는 한 가지, 오직 내 안에 주만 바라며 주를 의뢰하는 마음으로만 감당하게 하시기를. 이 잡다한 마음과 울렁거리는 심정을 주께서 붙들어주시기를. 내 안에 싫은 마음을 제하시든 주의 긍휼로 채우시든,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38:9).” 다를 멀쩡하게 사는 것 같으나 모두가 병들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픈 줄을 몰랐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106:4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