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전봉석 2019. 11. 10. 06:43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는 이러하니라

대상 25:1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시편 105:1

 

 

우리의 직무는 주를 찬송하고 노래하는 일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2).” 찬양은 자랑하는 것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3).” 시편의 말씀이 오늘 다윗이 지휘관들의 책무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지휘 아래 왕의 명령을 따라 신령한 노래를 하며지휘 아래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는 오늘 말씀으로 그리 묵상한다(대상 25:2-3).

 

토요일에 성경공부로 오는 친구는 전날에 책임자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감기기운이 있어 못 왔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곁에 있는 태국 여인에게 너무 관심을 주는 일에 대해 지적이 있었고, 그러느라 전과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도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통화를 길게 하며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떤 대답을 해주었으나 그 심정을 알 것 같아 속상했다. ‘그나마그 여인에게 마음을 주며 시달리는 게 덜 외로웠던 것인데, 더는 카톡도 연락도 모두 끊으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싸움은 외로움일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도로 카톡이 와서 그러한 마음을 비치며 심심하고 외롭고 한심한 자신의 사정을 토로하였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나는 저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함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였다. 곧 나에게 두신 이 귀한 사명인데 나는 늘 속수무책이라, 고아이고 혼자 외따로이 사는 장애인으로, 이처럼 주말이나 혼자 있을 때는 그 무료하고 적막한 시간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은 저에게 뭐라 말로써 위로해줘야 할까?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61:1-3).”

 

같이 뭐라도 하고 싶으나 또한 그럴 주제가 못 되어서, 가령 오후에 세차장에 들어갔다가 순간 공포가 밀려와 죽는 줄 알았다. 괜찮겠거니 하고 들어간 터널인데 고작 4-5분 정도의 밀폐 공간에서 꼼짝도 할 수 없을 때의 아찔함으로 나는 심한 고통을 느꼈다. 안정제를 녹여 삼키고 눈을 질끈 감고, 그 짧은 찰나의 공포는 내가 얼마나 어쩔 수 없는 위인인가를 새삼 일깨우는 일이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알지만 육을 입고 사는 동안 나는 나로서도 별 수가 없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간신히 밀려나왔을 때의 어떤 서러움인지 자괴감인지, 나 같은 이가 대체 누굴 위해 무엇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나? 저에게나 아이들에게나 나는 늘 모자라고 부족하고 부끄러워서 속상하고 미안하다. 이 일을 내게 두시는 주의 영에도 송구하고 죄송하다. 나는 시무룩하여 공연히 입을 댓 발 물고 침묵 속으로 잠겼다. 아내와 딸애는 급 말이 없는 나 때문에 눈치를 살피고, 무슨 일인가 하여 조용하였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존재인가? 주일 날 아이가 온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즐거워하면서도 그 애를 새삼 상대하고 돌봐야 한다는 일에 불편하다. 솔직히 싫은 일이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4-6).” 내가 받은 은혜 앞에서 나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누가 짧게 글을 올렸다. 늘 보면 강박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고수하는 듯 스스로도 어려워한다. 저를 보면 항상 나 같아서 안쓰럽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그 안에 기쁨이 없어 조금만 무슨 일에 사로잡히면 밀려드는 회의와 갈등으로 힘들다. 그 힘을 다른 이에게 분출하여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범사를 좋게 여기지 못하고 감사로 받지 못한다. 좋을 때야 누군 못할까? 나는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와 같은, 거울을 보는듯하여 민망하다. 언제쯤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래놓고는 자신을 지지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는 그 무거운 굴레와 멍에를 지워 비판하고 평가하려 드는 것이니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5:10).”

 

어쩌면 우리의 가장 큰 난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버지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큰 아들이 훗날에 뉘우치고 돌아온 동생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일처럼, 그때 아버지의 인자하신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과연 맏아들은 잔치에 참여하였을까?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15:31-32).” 여전히 종의 멍에를 메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한데 우리는 여전하여서 믿는다고 믿으면서,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잘하면서도 그 안에 자유함이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의 모든 죄책을 친히 감당하신 이가 계신데,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4-15).”

 

이제 우리는 자유의 법 아래에서 산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나는 저에게 또 누구에게 뭐라 답을 해주기 전에 내가 먼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자유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회개란 메타노이아로 생각을 바꾼다는 의미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 그러니 이 자유는 말뿐이지 않다. 마음이 느끼고 그 삶이 누리는 일이다. 영혼이 밝아지고 주를 찬송하는 일이다.

 

곧 순종은 그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강권하심을 알겠다. 주님은 우리를 너른 해변으로 휴양을 떠나자고 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흙탕물을 조물거리는 데 고집을 부린다. 얼른 나와서 유쾌한 식탁에 앉아서 즐거운 잔치를 하자는데 옷장 속에 쭈그려 앉아 고집을 부리고 있는 꼴이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로 사랑 안에 강권하시지 않으면 어쩔 뻔했나? 토라져 고집부리는 아이를 굶길 수 없어 달려와 아이 손을 이끄는 엄마와 시궁창 더러운 물로 범벅이 된 아이를 끌고 가서 씻겨 같이 해변으로 데려가는 아버지처럼.

 

내 안에 자원하는 마음을 더하시기를, 그럴 수 있는 주의 권능도 함께 하여 주시기를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나를 드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할 수 있기를. 내 몸과 마음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 나의 지체가 의의 무기가 될 수 있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이를 위해 오늘 말씀은 나의 일을 엄연히 알리신다.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105:1).” 감사하자. 찬송하고 알리자.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2).”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의 모든 기이한 일을 말하자. 그리하여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4).” 이를 위해서도 나는 주의 권능을 구하는 것이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4).” 아니면 내가 뭐라고 누굴 위로하겠으며, 누가 누구더러 주 앞에 나아오게 할 수 있겠나?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8-19).” 이 길이 주의 길이고 나의 길인 것을. 이로써 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땅을 그들에게 주시며 민족들이 수고한 것을 소유로 가지게 하셨으니(43-44).”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