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전봉석 2019. 11. 12. 06:58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문의 우두머리와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관원들이 그들의 숫자대로 반이 나누이니 각 반열이 이만 사천 명씩이라 일 년 동안 달마다 들어가며 나왔으니

대상 27:1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편 107:9

 

 

우리 안에 사모함을 주신 이가 또한 우리의 사모함으로 만족을 주신다는 말씀 앞에서 감사뿐이다. 우리로 주린 영혼을 알게 하시고 이를 주께 아뢸 때 채워주시는 은총을 또한 맛보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107:21).” 사는 동안 이를 이처럼 느끼고 누리고 감사에 감사를 더할 수 있는 삶이 복되었다. ‘기독교의 5대 기본 교리처럼 나의 전적인 타락을 돌아본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7-8).”

 

이로써 나는 의지로나 결단으로는 돌이킬 수 없었는데 이에 앞서 무조건적인 선택이 계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1:4-6).” 이는 제한된 속죄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2).” 모두를 사랑하시되 전부를 위한 게 아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안다.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삶 가운데서 누린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2:5).”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이가 우리 성도의 삶을 견인하신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6:39).” 이로써 성경은 분명히 일갈하시길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나의 하루가 풍성한 것은 그 가운데 주의 은총이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지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필요한 손길을 통해 주의 돌보심을 알게 하시고, 내 안에 이는 불평이나 불만을 부끄럽게 하신다. 몸은 죽을 것이니 영혼은 살아야 하는 일에 있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3-14).”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그의 돌보심을 깨달아 알게 하신다. 엄연히 그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다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가령 나는 아이의 글을 읽을 때면 헉, 하고 숨이 막힐 때가 있다.

 

열다섯 살 소녀가 무슨 이유에서 익명의 랜덤 채팅방에 가입을 했었을까? 분명히 ‘15세 소녀라고 밝혔는데 거기에 자신의 성기를 찍어서 쪽지로 보내는 인간들은 어떤 종류일까? 물론 아이에게 글쓰기를 권하였지만 그와 같이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 아이의 글 앞에서 나는 주춤하는 것이다. 이를 감당할 수 있겠나? 나는 다음 글이 궁금하기보다 앞서서 안타까움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얼추 한 달이 지나면서 한 시간은 나의 메모를 정리하고 한 시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고 한 것이다. 대신 나는 아이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끼니를 못 먹고 오는 것을 주전부리할 것을 준비해놓기로 하였다. 아이에게만 집중하다가는 지레 내가 죽겠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그래서도 나는 더욱 가열하게 메모를 한다. 일부러 성경구절을 옮겨 적거나 이미 설교원고로 작성한 내용을 풀어서 다시 손으로 옮겨 적어둔다. 아이는 이를 보면서 문서작성을 하고 그러는 동안 말씀을 한 구절이라도 읽고 맛보게 하려고. 우리의 그 어떤 삶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8).” 나는 아이에게 잘해주어 그 속에 담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어 심리적인 안정이나 새로운 삶으로의 도약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상담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아이에게 주어진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은 반드시 죽음뿐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나는 아이의 글에서 내가 지레 겁을 먹는다.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나? 주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이 아니고는 나 같은 위인이 감당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스물세 살 아이는 혹시 아빠한테 연락이 왔느냐고 묻는데, 이를 어째야 할까? 주님이 내 마음에 어떤 신호를 주시길 기도할 따름이다. 그저 주저하고 있기만 해도 되는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지, 담대하게 연락을 취하고 부딪쳐야 하는지. 나는 열일곱 아이의 칙칙하고 무거운 자기중심적인 글을 읽으면서도 숨을 몰아쉰다. 대체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온통 그늘이 져 외롭고 습습한 아이의 내면뿐 아니라 실제의 뚱한 태도나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과연 나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맡기신 것일까? 흘러가듯 하고 있지만 과연 이러는 게 맞는 것인지, 다음은 내가 어찌 처신해야 옳은 것인지생각이 누적될수록 나의 안정제도 늘어간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어림없다. 나 하나의 문제로도 말이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나는 아이가 아닌 아이를 귀히 여기시고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만 보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해주시기를 바란다. 안 그러면 지레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6-8).” 성령으로 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늘 어눌하고 버벅거리는 심정이라, 아이의 고백이 귀하면서도 내가 먼저 겁을 먹는다. 도대체 이 칙칙한 세상에서 아이들의 영혼을 어찌 주 앞에 인도할 수 있을까? 결국은 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임을 믿는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결국은 내가 행하나 내 일이 아니다. 내 일이면서 결국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가 하실 것이다. 주만이 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

 

내 안에 두시는 평안도 또는 안타까움도, 감사도 또는 불안까지도, 이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있음을 바로 알 때 오히려 덤덤해지게 된다. 이는 소망이다. 우리의 어려움은 이내 소망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1:2-4).” 그러므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그러다보니 졸지에 나의 하루는 열심을 다하게 됐다. 열심히 읽고 쓰고 메모를 해야 하는 까닭도, 거듭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뢰게 되는 이유도, 어떤 부담과 성가시고 어렵고 하기 싫은 마음조차도 주께 내려놓고 또한 내려놓게 되는 일이었으니. 이처럼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기 위해 일찍 잔다. 아이 하나하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여느 친구나 책이나 오락을 찾을 시간을 피한다. 언제부턴가 나의 하루가 빠듯하게 흘러가는듯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여유로움은 주를 바람이었다. 30분 더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묻는 아이에게 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고, 차라리 30분을 일찍 오라고 하였다. 그러니 더 자야 할 텐데 아이는 어찌 선택을 할까?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16:4).” 그러니 주만 바라고 나아가자. 다윗이 종교나 정치 군사 모든 체계를 갖추어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나의 하루에서 영적인 질서에 대해 그 정비와 새로운 체계를 묵상하게 된다. 이에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선택만이 따를 뿐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주가 이루실 것이다. 주가 다 담당하신다. 나는 다만 그의 증인이다. 고로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107:31).”

 

그리하여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