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대하 5:14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시편 114:7
‘나’는 개별적으로의 나를 벗어난다. ‘야곱의 하나님’에서 야곱은 단지 그 개인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닌 것과 같다. ‘나’는 ‘너’에게 또는 실제의 나에게 생명을 주고받는다. 가령 ‘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거나 산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나는 예전의 내가 있고 오늘의 내가 있다. 여기에서의 나는 같거나 다르다. 또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이다. 다시 야곱을 지켜보면, 저의 노년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창 46:4).” 여기서 ‘너’는 개별적인 ‘나’로서의 ‘너’가 아니다. 나를 초월하는 너로 그 민족 이스라엘 백성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관여와 섭리가 계속되어지는 주의 백성으로서의 너이다. 곧 아담의 죄가 단지 아담 개인의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속량하심이 또한 저의 죽으심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주의 나라에 속한 자녀들에게 전가된다.
곧 ‘나’와 나는 같거나 다르다. 나와 너는 엄연히 같지 않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고전 15:40).” 그러므로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1).” 일련의 상황을 비춰 오늘의 나는 예전의 나와 다르지만 여전히 예전의 나는 오늘의 나 안에 있고, 딸애는 같은 고민을 하듯 ‘나’의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하나님 또는 할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실은 믿지 않는 자의 가정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이야기와 같다. 의당 그러려니 하고 여겨지는 것과 실제 이를 ‘나’의 이야기로 되받아내는 일은 다르다. 영혼의 문제는 단순히 분화된 신경세포로 전달된 섬유물질이 아닌 것이다. 거부하는 경험으로 스스로 분절되며 뼈마다가 자라듯 그 영혼도 자라가는 일이겠다. 곧 정신적인 고뇌, 고난, 시련, 역경과 같은 시기가 분화를 일으킨다.
가정예배 중에 나는 전날에 혈기부린 것을 딸애와 아내에게 사과하였다. 그처럼 바닥을 보이고 나면 특히 가족들 앞에서는 어디 숨을 데가 없어 난감하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실제의 나와 다르지만 그럼에도 실제의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나와 다르지 않다. ‘나’는 새롭게 저 앞에서 괴로워하는 ‘나’ 곧 딸애의 모습으로 전가된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고전 5:3).” 그런 세월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그 길을 건너야 하는 딸애나 혹은 아내에게 나는 유구무언이었다. 얼마나 지겹고 또 싫었던지! 단지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일찍이 교사를 하고, 차량 운행도 하고, 교회의 부교역자처럼 굴어야 했던 일들이 그렇게 싫었다. 이내 뛰쳐나와 배회한 세월이 족히 10년이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좋았던 기억보다 안이하고 나태하고 더욱 세상과 휩쓸려 살았던 시절이었다. 부디 나와 같은 길이 아니기를,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갈망하는 딸애에게 부연하였다.
바울이 황당한 일을 겪고 제자들에게 권하였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2).” 믿음에 머무는 일이 마냥 좋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데 성경은 초점을 맞춘다. 왜 우리가 믿음 안에서 바로 서려하는데 환난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생활하면서 나름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 뭔가 일이 순탄하고 형통하여야 옳을 것 같은데…. 먼저는 이와 같은 고통은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경험하게 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그러니까 굳이 안 믿는 자들로서는 그러한 어려움도 없다. 회피하고 모색하여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그러니까 나는 딸애의 오늘의 고뇌가 ‘의를 위하여’ 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 이해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을 모른다면 안이함과 나태에 사로잡힐 따름이다. 가령 오후에 오는 아이를 볼 때면 기가 차서 말이 다 안 나온다. 왜 그렇게 자고 자도 또 자고 싶다는 것일까? 결국은 수요일 하루는 안 오기로 하고 다른 날을 30분씩 일찍 와서 더하기로 하였다. 그러니 애는 간신히 잠을 깨우고 온다. 밥맛도 없어서 뭘 줘도 깨작거리다 만다. 하루는 김밥을 어제는 도넛을 준비하고 바나나도 사다놓았는데 먹다 말거나, 배고픈 걸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단순한 예이지만 우리 영혼이 병들면 굶주림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기력이 없고 기력이 없으니 그저 자꾸 눕고만 싶고 누워서 잠들고만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두시는 환난은 단지 죄로 인한 것이기 보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시기도 하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 3:3).” 마치 이는 독감 예방주사와 같은 것이다. 미리 우리 몸에 병원균을 넣어 면역이 생기게 하는 것과 같다.
이는 결국 우리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삼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를 되레 자랑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살후 1:4-5). 실제로 이와 같은 고난이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그러므로 속량을 기다린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오후에 오는 아이를 보면서 나태와 안이함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아이도 안다. 스스로도 그럼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상한 심령이라. 어찌 됐든 아이가 주일에 어디 교회를 간다고 하니 주의 영이 저를 어루만져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런 점에서도 결국 오늘 우리의 환난은 이내 소망을 이룰 줄을 알게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세상에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고통이 즐거울 리 없고 괴로움이 좋을 리 없다. 다만 우리는 그럼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이 인내하게 한다. 내가 아이에게 자주 조금만 견뎌봐, 이번 주만 이겨봐 하고 하나마나 한 소릴 되풀이하는 까닭도 인내도 습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인내로 우리의 연단, 곧 인격은 형성된다. 영적인 성장이란 그저 막연한 구호나 지적인 만족이 아니다. 징글징글한 현실에서 지긋지긋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내함으로 생성된다. 그와 같은 인격이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는 이제 말씀으로 알기 때문에 몸은 어렵고 마음은 무거워도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른 자리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 이를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병렬식으로 읽으면 이해가 쉽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셨다.’ --> (그 값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는 ‘노하심에 이르게 하신 게 아니다.’ --> (어떠하든) --> ‘우리로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작용된다. 결국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다.’ -->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다.’ 이렇듯 말씀을 밑줄 긋고 화살표로 그 의미의 뒷받침 내용을 연관지어보면 그 뜻이 분명해지는 것을 느낀다. 성경은 이를 당연한 원리로 설명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어느 것도 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도 주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 없다. 우리가 원치 않는 환난도 역경도 괴로움도 그러므로 모두 선을 이루는 데 유용하다.
이 일은 결코 우연히, 어쩌다 그리 되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앞서도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엄연히 그 뜻과 목적과 의도가 명확한 것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환난까지도 축복이다. 전에 지나왔던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도, 지금 그와 같은 갈등과 고뇌에 빠진 딸애의 심정도 결단코 그저 그런 한 때의 객기나 반항이 아니다. 주를 만나고 비로소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데 있어서 어쩌면 필연적인 과정이고 숙명이다. 나는 딸애의 이런저런 갈등과 고민을 지지한다. 딸애에게도 말했듯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고 뭘 해도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는 심정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고. 이 모든 게 진노하시기로 정하신 게 아니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든지 자든지, 그러므로 곧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그것 외에는 우리로 영광 가운데 머물 게 할 것이 없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 나는 오후에 오는 아이가 또는 나의 딸아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이미 우리 죄로 죽으셨다.’ 다시 말해 더는 우리가 죄 때문에 망할 일은 없다! 그리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저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로 영생에 이르는 줄을 안다. 이는 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성경이 그리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는 다만 맡은 자로 충성을 다함으로 영광을 누린다.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4).”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리 읽고 이해한다. 이를 경외함으로 두려워 떨 줄 아는 것이 복이었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시 114:7).” 믿지 않는 자는 알지도 못할 소리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5).” 다른 여느 피조물들도 다 안다.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6).”
그러므로 우리도 안다. 주 앞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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