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대하 7:16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시편 116:5
주의 성전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거행하는 대목을 상상하는 일은 경이롭다. 그 장엄하고 화려했을 광경을 묵상해본다. 주가 거하시고 함께 하셨을 곳에서,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대하 7:16).” 이를 솔로몬의 성전으로만 국한 지을 게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의 삶으로 놓고 본다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씀이고 약속인가? 주의 이름을 내 삶에, 내 아이의 인생에, 저 활동범위 안의 모든 시공간에 영원히 있게 하시겠다니… 곧 주의 눈과 마음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니… 그러므로 우리의 탄성은 저절로 찬송이 되어 나올 것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시 116:5).”
모처럼 오전에만 아이가 오고 혼자였다. 누가 김치를 들고 와서 같이 점심을 먹고 저의 생활을 들려주고 간 게 다였다. 오후 내내 딸애의 이야기에 마음이 어려우면서도 복잡하였다. 결국 두 교회를 두고 어디가 좋을지 물었고, 어디가 됐든 주의 인도하심이 있을 것이고, 또한 함께 하시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내가 자신을 존중해주어 좋다며 고맙다고 하는 딸애의 카톡 내용이 뭉클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나름 나는 아이를 ‘위하여’ 많은 나의 주장을 물리고 존중하고 살았던 것 같은데, 그러한 나의 태도가 처음으로 아이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데서 마음이 아팠다. 흔히 말하길 한다고 하는데, 이게 다 ‘너를 위하여’ 할 때의 ‘위하여’가 때론 참 폭력이 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위하여’가 전적으로 상대를 위한 것이기는 어려워서 우리는 저마다 누구를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것이 자기만족인 경우가 흔하고, 그럴 때 그것은 이미 폭력이 된다.
다 저녁이 되어 문득 유튜브에 들어가 옥한흠 목사의 설교 영상을 하나 보았다. 우연처럼 <죄 짓고 벌 받는다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욥기 4장 1-11절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늘 그렇듯 하나님은 나에게 시의적절하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곧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이 세 번, 소발이 두 번 각각 논쟁하듯 자신들의 생각을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하여 충고하였고, 이에 대해 욥은 또한 각각 여덟 번을 답을 하는 형식의 길고 긴 언쟁을 볼 수 있다. 저들 말은 다 옳다. 오죽하니 욥기서는 지혜서로 분류되어 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보면 맞는 말이라고 다 옳은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되레 저들의 말에 화를 내셨다. 그러면서 설교는 각각 친구들의 말을 정리해주고 있었다.
엘리바스는 가장 나이가 많은 친구였다. 저는 자신의 경험을 들어 ‘내가 보았다, 경험했다.’ 하는 식으로 자기 의견을 말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4:7).” 심지어 그 말씀을 받았다, 계시로 보았다, 하는 식의 종교적 도덕주의자 같이 언변을 살렸다.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12, 16).” 그러면서 정죄하였다.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22:5).” 넘겨짚어 그리 정죄하고 단정지어 다그치고 윽박지르듯 비난하였다.
또 다른 친구 빌닷은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전하여져 오는 말과 전통을 들어 ‘~에게 물어보라.’ 하는 식으로 주장한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운운하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3).” 저는 종교적 율법주의자로 주장하고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죄악으로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끝으로 소발이란 친구는 두 번 말하는데 저는 좀 경박하고 경솔한 사람이다. 막연하게 뒤집어씌워 때려잡듯이 ‘~을 알아야 돼!’ 하는 식이었다. 마치 하나님이 벌주시는 게 당연한 것처럼 가볍게 말한다.
나는 우연처럼 열어본 옥한흠 목사의 설교에서 하루 종일 내가 끙끙거리고 있던 마음을 단박에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듯하였다. 저 세 사람의 논박이 다 내 스타일이 아니던가? 종종 딸애가 말할 때, ‘아빠와 말할 때면 대답할 말이 없어. 다 맞아.’ 하는 식의 대꾸를 한 적이 있었다. 뭐라 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이를 마치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치에 맞는지 정죄하고 그저 옳은 소리만 지껄이는데, 그게 그처럼 단호했던 것은 ‘이게 다 너를 위하여’ 하는 소리라는 신념으로 하였던 것이다. 나는 설교영상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게 나였다. 내가 엘리바스였고 빌닷이었고 소발이었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하였고 종교적인 자세를 곁들여 성경을 운운하며 마치 나만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상대를 다그쳤다. 또는 어디서 들었던 말이나 누가 그랬다는 식의 근거를 가지고 율법주의자가 되어 원칙과 이치를 강조하며 운운하였다. 물론 소발처럼 막무가내로 경솔하고 막연하여 윽박지르듯 꽥꽥거리기는 좀 그랬나?
‘아빠가 처음으로 내 의견을 존중하고 인정해줘서 좋아. 고마워.’ 하는 딸애의 말이 하루 종일 목에 걸려서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어떤 서글픔인지 한심함인지…. 나는 나름 한다고 했고 존중한다고 했는데 그게 다 너를 ‘위하여’ 그러했던 것인데, 하는 서운함인지…. 실은 자식 일에는 그처럼 이성을 잃는 게 사실이다. 남의 말은 잘만 들어주고 끝까지 기다려주고 인자하게 돌보며 위로하기 그지없는데 꿀떡대고 역정을 내거나 단호하게 선을 긋고 옳고 그름을 단정 지으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게 다 ‘너를 위하여’ 하는 아주 강하고 공식적인 부모라는 이름으로의 폭력이었다. 그것이 내 아이의 가슴에 서러움과 억눌림으로 응어리져 있었다니!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권위 또는 이제 목사로서의 권위, 믿는 자로서의 권위를 어찌 다루고 간직하고 보존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나는 나를 전제로 드리기까지 겸손하였던 적이 있었나?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드려지고 불살라져 나는 없어져도 우리가 주께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그러므로 더욱 사랑할수록 그러해야 하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였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나는 말씀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가족들에게 미안하였다. 이거밖에 안 되는 자신을 두고 주께 웅얼거렸다. 입을 내밀고 금방 울 것처럼 앉아서 어려운 마음을 아뢰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살았다. 이제는 성경을 들먹이고 마치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계시를 받는 사람처럼 아이 일에 또는 누구에 대하여 운운하기를 잘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데 있어 자신의 주장과 신념에 함몰되는 것이 단순히 정치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부모자식 간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목사로서 누굴 위하고 대할 때도 여지없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딸애와의 대화에서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심란함으로 오후 내내 모처럼 아무도 없는 글방 안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늘 그렇게 하시듯 말씀으로 나를 불러 세우신 것이다. 저의 설교를 의도해서 찾아 본 것도 아니었다. 엄밀하게도 나는 이제 주께서 능력 주시는 안에서만 감당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무 것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를, 우리를 이 성전에 두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8-20).” 아이의 아픔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는 그의 기쁨이 나를 더 기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몸이라. 그런데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21).” 그럼에도 종종 다그치며 무슨 문제는 다 너 때문이고 너의 죄 때문이고 너의 악함 때문이라고, ‘너를 위하여’ 옳은 말을 휘두른다. 그런데 성경은 이어서 그 원리를 다시 일깨우신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22-25).”
오늘 솔로몬이 낙성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엄연한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 알 수 있다.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대하 7:17-18).” 말씀 앞에 우선해야 할 것에 대하여 엄히 경고하신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 성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그리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21-22).” 경고의 메시지 가운데 앞으로의 일을 알려주셨다.
말씀 앞에 앉아 나의 한심하고 처량하고 송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회개한다. 그렇듯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시 116:1).” 울컥하여 어깨를 들썩이면서 주께 용서를 구하였던 것도 그것이다. 내가 욥의 세 친구 같은 사람이었다. 옳은 말과 바른 말로 상대를 다그쳐 주눅 들게 하거나 나는 마치 그 옳고 그름에서 자유로운 사람처럼 굴었다. 아,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2).” 주께서 나를 용서하시기를. 이와 같은 일련의 일들을 통해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더욱 더 경험할 수 있기를.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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