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전봉석 2019. 11. 22. 07:0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의 기초를 쌓던 날부터 준공하기까지 모든 것을 완비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나니라

대하 8:16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2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다른 대안이 없다. 저마다 자기 생각과 판단과 기준을 견지하며 살아간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주의 마음의 첫 걸음일 것 같았다. 어쩌다 아이와 길게 대화하게 되었다. 전날에 쉬었으니 뭘 했나, 하고 물었던 것이 종일 트윗을 하며 그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심을 공유하고 이야기 나누며 빈둥거렸다고 하였다. 나는 그 세계가 가상인지 일상인지, 그 구분은 어디에 있으며 너는 지금 어느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의외로 아이는 말을 잘했으나 그 의미는 저기 어디쯤에 머무는 아이 같았다. ()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 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각에 대한 억지나 자부심으로 넘쳐났다. 가령 부모의 무한책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남은 생을 저들 등에 업혀 살아도 된다는 식의 주장에는 마음이 아팠다.

 

이성복 시인의 말처럼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픈 사람이 없었다.’ 아픈 걸 느끼지 못하니까 저마다 자기 생각에 빠져 그저 달콤함에 젖어있기를 바랐다. 그렇듯 종일 빈둥거리며 트윗을 하고 가상과 일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적 취향이나 개인의 성향을 우선하면서, 그게 왜 나빠요? 하는 데 따른 나의 대답은 궁색하였다. 왜냐하면 정색을 하고 아이의 생각을 반박하거나 성경의 진리를 제시하기에는, ‘아픈 아이였다. 오전에 오는 아이와 그의 글을 읽고 곧이곧대로 묻고 따지고 가르칠 수 없다. 오후에 오는 아이와의 대화에서도 그러하였고, 다섯 시에 온 아이와 아이의 글을 놓고 또 그 생각을 듣고 답하는 일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저녁에 가정예배에서 같이 읽은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라.’는 말씀에서 가슴이 다 먹먹하였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5-6).” 이와 같이 원대한 주의 계획을 믿고 나아갈 뿐이다.

 

현재로서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나 저 아이들을 내가 어찌 감당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위해서도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소망을 두는 것이다. 같이 성경을 읽고 또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이제 필연이 되었다. 아니면 내가 살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구와 대화할 때면 입버릇처럼 중보기도를 부탁한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26:38).” 주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몸소 체휼하심으로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어쩌면 나는 날마다 나와 싸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과의 대화가 또는 저들의 글이 나로 하여금 나의 심령을 낙담하게 하는 것이다. ‘아픈 아이. 즉 상한 심령들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나로 하여금 오히려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주 앞에 나아오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6).” 그러므로 영의 속성은 땅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대체 아이들에게 뭐라 일러 설명을 해줘야 할까? 뭘 안다고, 두 아이가 다 동성애자라며 스스로 커밍아웃하였다. 그걸 다그쳐 물을 수도, 옳고 그름을 떠나 나름의 생각으로 반박하는 아이들을 향해 나는 오히려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톨스토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쳤지만 거듭나야 할 필요를 무시했다. 저마다의 지론을 가지고 사는 일이라,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눈과 귀는 보고 들음으로 복이 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그러므로 고통 없이는 그 무엇도 태어날 수 없다. 사람은 고통 없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날 수 없다.’ 나는 이 말의 의미에 공감한다. 아니 어쩔 수 없음을 재인식한다. 그만큼 사람이 악하다. 고분고분할 수 없는 게 죄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독자성과 개별성은 무너져야 한다. ‘개별성은 인격적 생명을 덮고 있는 딱딱하고 두드러지며 다소간 추한 껍질과 같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이 바로 죄의 속성이다.’ 아이들 저마다의 개별성을 운운하지만 이를 제거하고 용서함을 얻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다. 유일한 방법은 위로부터 거듭나는 것이다. 오직 순종 말고는 답이 없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3-24).” 진이 빠져 있을 때 누가 전화를 하였고, 나는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주의 자녀 삼은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수고할 것을 기대하신다.’

 

하긴 우리가 순종할 때 곁의 사람들을 아프게 할 수 있다. 그러한 관계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6-27).” 나는 아이와 대화를 하다 그 부모의 몰지각과 무책임함에 화가 났다. 내가 듣기로 그게 온통 다 빚인데, 너는 평생 놀고먹어도 돼! 하고 스스로들 아이의 발목을 묶어버렸으니, 아이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이 그러한 자신의 형편을 운빨이라고 여겼다. 그런 아이에게 대체 무슨 말로 어찌 설명을 하고 위로를 하고 다독이며 심지어는 야단을 쳐야 할까? 가장 귀한 것은 그런 아이에게 욕을 퍼붓고 쫓아 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훌륭하게 여겨졌다. 역겨웠고 버거웠고 고달팠다. 그럼에도 내 안에 두시는 마음이 신기하여서, 나는 아이를 토닥거렸고 감싸주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저들의 영혼의 황폐함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는 결코 내 마음이 아니다.

 

성경을 보다보면 주님을 삶을 본받으려 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위로부터 거듭났다는 뜻은 회심 이상을 의미한다. ‘거듭남이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안에 형성된다는 뜻이다.’ 내가 어찌 받아들이고 어찌 결단하여 어찌 동의하고 실행에 옮겨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다들 구원 받은 사실에 멈춰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 아니다. 이해로, 설득으로, 대화로 전가하고 전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지적 게으름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우리의 논쟁과 탐색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믿음에 의해서만 성경을 보고 듣고 안다. 믿음은 나의 인격적인 영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요즘 어찌 이해하는가 하면, 내가 저 아이들을 대하면서 드러나는 나의 태도에서이다. 정말 하기 싫다. 듣기도 싫고 저들 말에 대꾸하고 싶지도 않다. 정신 상태가 썩어빠져서! 싸가지가 없어서! 예전 같았으면 가라! 하고 돌려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상종을 안 하면 그뿐이다. 돼도 않을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저런 소리에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오늘은 오히려 회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밥도 잘 안 먹고 다니는 아이에게 연어초밥을 사주기로 하였다. 종종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다.

 

성경은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이를 인위적으로 저 아이에게 설파하여 구원으로 이끌려는 게 아니다. 하긴 상식으로만 사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잘 지낸다.’ 저마다 자기 생각으로 잘만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7).” 예수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것일까?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5:39).”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말 그대로 아무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뭐하겠나? 그게 다 옳은 말이고 좋은 글이고 탁월한 지혜의 언어이고 구원의 말들이라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나? 온 세상이 난리다. 미쳐 돌아간다. 아이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며 걸어오는 길마다 신천지가 득실거린다. 어제의 같은 여자가 어제와 똑같은 말로 접근하다 같은 사람인 것을 알고 주춤하는 표정도 전날의 것과 같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이를 우리가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인가?

 

그래서 인근의 큰 교회에서 자구책으로 그러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경쟁하듯 찬양을 하고 물티슈를 나눠주며 난리에 난리를 더한다. 오가는 사람들은 서로들 그 사이를 피해서 걷는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2-3).” 진리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말로 이길 수 없다. 막무가내로 떼쓰는 아이에게 무슨 수로 교양 있고 차분하게 아이를 설득할 수 있겠나? 그러니 분별하고 대응할 수 있는 한 길은 순종뿐이다. 그냥 하는 것이다. 순종은 무모할 따름이다. 굳이 이 일을 해야 하나? 내가 이렇게 한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나의 의문조차 풀 길이 없다. 명령에 따를 뿐이다. 깨달음은 나중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언젠가 나도 저러했고, 더했고, 그때는 내가 더 악랄했고, 추했고, 막무가내였다. 그때 일을 일일이 다 열거한다면 나에게 돌아올 것은 환멸뿐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정작 나이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면 그게 다 고집이고, 말들이고, 억지고, 대항이다. 나는 자꾸 나를 본다. 내가 보이면 보일수록 주의 은총과 긍휼하심만을 찬양할 따름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러던 내가 하물며 누굴 탓하고 욕하고 한심하게 여길 수 있겠나? 그래 맞다. 구원을 얻기 전까지 철저히 깨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고집 때문이다. 참 신기할 노릇이다.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 중에는 그들이 주님께 가지 않기 때문에 겪는 불필요한 것들도 너무 많다. 나는 아이의 일에서도 그렇지만 아이와 이야기하다 그 부모의 얼토당토않은 짓거리에 더 화가 났다. 나는 여기서 내가 아닌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운다. 이를 위해 내가 비워져야 하는 것을 느낀다. 아니면 아이들을 담아낼 자신이 없다. 그냥, 순종뿐이다. 주의 이름을 마주하고 주의 마음으로 섬길 따름이다.

 

옳고 그름을 따질 여력이 나에게는 없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의 기초를 쌓던 날부터 준공하기까지 모든 것을 완비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전 공사가 결점 없이 끝나니라(대하 8:16).” 그저 행할 따름이다. 실은 주가 다 하셨다. 이에 찬송한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117:2).” 그러므로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1).”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