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전봉석 2019. 11. 23. 07:12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대하 9: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편 118:6

 

 

하나님이 더하시는 것에 대하여, “솔로몬이 그가 묻는 말에 다 대답하였으니 솔로몬이 몰라서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2).” 이에 찬송한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7).” 주의 은혜로 산다는 게 나날이 이러하여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검증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야 한다. 저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찾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증명한다. 단지 그것으로 우쭐하는 게 아니다. 가만 보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강력한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내 것이 아니다. 실천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나의 몫이다. 다만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3).” 어떤 상황 가운데서,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안 벌어진다는 게 아니라 깨어있든지 잠들었든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32).”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루를 보내는 동안 나는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절감한다. 주의 돌보심이 아니면, 주가 내 편이 아니시면, 나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할 뿐만 아니라 나의 속성도 나를 돕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저 아이와도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 안에 계신 주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의 일은 단순히 밥벌이를 위한 것도, 어떤 보람을 추구하고자 하는 일도, 단지 한 영혼을 돌이켜 주 앞에 세우려는 일도 아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려는 데 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 단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게 아니라 그의 통치를 바라고 그 안에 사는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아이들의 이런저런 상황이나 상태에 대하여는 내가 어쩔 수 없다. 무슨 전염병처럼 무기력이 만연하고 스스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이를 지향하며, 이를 마치 아주 특별한 자신으로 여겨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뭐라 한들. 나는 평범한 삶 속에서, 모든 우연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죄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죄를 멈추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저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말보다 보이는 나의 모습과 훈계보다 나의 삶 자체로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불순종을 제거해주지 않으신다. 안 믿으려는 의지를 없애주시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동화되게 하는 길밖에! 말로써는 저 아이들을 이길 수도 설득하여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들이 갖고 있는 정신과적인 병력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죄의 문제였다. 안 믿는 그 부모의 것과 가족과 이웃하고 사는 친구들의 죄까지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다보면 하나님 빼고 다 좋다는 식이다. 하나님만 싫은 것이다. 행복도 인내도 성공도 시련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을 주관하시려는 하나님은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가 아이를 또는 내 자신을 이길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을 또는 내게 보내시는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는, 완전히 양도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형성되신다. ‘위로부터 거듭나면 사실 거듭나기 전보다 훨씬 평범한 사람이 되는데, 그럼에도 스스로는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유년시절도 바로 그 평범함 속에 특별함이 있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2:40).” 우리의 무가치한 듯한 시간들도 실은 놀라운 시간을 잉태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아이들과의 시간에서 그와 같은 소망을 가진다. 아니면 어찌 감당이 안 된다. , 그 연단에서 소망이 이루는 줄 앎이다. 그래서 환난도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다. 이는 거저 된 게 아니었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 죽으셨다. 이 모두는 우리를 구원하여 자신과 함께 살게 하려는 일이다.

 

이번 한 주간은 이와 같은 말씀으로 붙들려 살았던 몫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9-10).” 오늘 나로 여기에 두신 것, 이와 같은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 또는 이러한 아이와 이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함께 하게 하시는 것 모두 다 포함된다. 이는 결코 하나님의 노하심이 아니다.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 때문에 예수께서 죽으셨다.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

 

한참 때다. 젊을 때 청소년 시절에는 모든 것이 신나고 분명하게 보이는 때이다. 그 확신을 꺾는다는 것은 미운 세 살 때와 다를 게 없다. 뭐라 해도 반항한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은 자라난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6:27-28).” 저는 그저 심기어진 까닭으로 산다. 거기 두신 이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 식물이 가장 연약한 것 같으나 그 의지력은 모든 생명보다 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찌해볼 방도가 없다. 온전히 심은 자의 뜻을 따를 뿐이다. 요즘 나는 그와 같은 경험을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 주께 순종하면,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무의식적인 생명이 우리 안에 형성 된다.’

 

어제도 나는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별 걸 다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 말이다. 회식이랍시고 아이에게 맛있는 걸 사주었다. 노래방에도 갔다. 한참 싱그럽고 발랄할 나이였다. 뭘 해도 다 예쁘고 아름다울 계절이었다. 그런 아이가 어쩌자고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아무 것도 하려하지 않는 것일까? 그저 게임이나 하고 핸드폰으로 트윗이나 하고 그 안에서의 사람들과 낄낄거리는 게 고작이라니! 나는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싹트고 있을 것을 상상했다. 새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다. 새 생명은 들의 백합처럼 자라난다. 내가 안달하고 가르치고 억지를 부려서 될 게 아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불평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16:4).” 주는 나와 함께 계신다.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생명이 아이의 속에도 계신다. 그 증거는 우리의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싹이 트고 움이 자라나기까지 나는 무던히 주만 바라며 나아갈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성장시키시도록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간을 충분히 드려야 한다.’ 그러기까지 나는 인내로 연단된다. 연단은 어느새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 나도 모르는 동안에 자라나서 꽃이 피는 들의 백합화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하시는 일이다.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어떤 상황이 지나고 나면 이를 다 잊어버리는 것 같지만, 갑자기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찬양하게 한다. 즉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의 무의식적인 세계를 빚어 가신다. 아이의 속에 은연중에 주가 자리하신다. 주의 생명이 잘 자라나게 하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현실적으로 어느 곳에 처하는지, 심기어지는 자리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일이다. 다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우리 삶 가운데 공개하신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40. 52).”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진리는 이것이다. 중생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와 같은 고통도 느낄 수 없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35).” 다시 말해 내가 저 아이 때문에 왜? 지금도 나의 온 생각과 마음이 왜 저 아이에게? 결국은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가 일치한다.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도 위로를 얻는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118:6).” 솔로몬에게 주셨던 그 모든 지혜와 부귀와 칭송과 영광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다만 더하신 데 따른 실행과 순종은 우리 몫이다. 이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오늘 내게 두신 저 아이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 다른 길 있겠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곧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