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전봉석 2019. 11. 27. 07:18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대하 13:5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시편 122:7-8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2:13).”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보존하기 위해 소금은 쓰였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18:19).” 곧 소금 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순종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 본문을 열왕기서에서와 달리 아비야를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약속을 붙들고 오늘 시인의 말씀을 음미한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사는 데 따른 고단함이 있을 뿐이지만,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고 축복한다(시편 122:7-8).

 

실은 오후에 오는 아이가 울었다. 나의 메모한 것들을 작성하고 묵묵히 일하는 아이에게 코코아를 한 잔 타주고 잠깐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빠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엄마이야기에서 와락,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스스로 말하길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고 있고 자신의 눈물코드는 엄마라고 하였다. 나는 순간 긴장하였고 준비되지 않은 말을 어루만지며 아이의 울음을 돌렸다. 역시나 울고 싶은 아이였다. 그냥 울릴까하다 서로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음으로 미뤘다. 울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자기연민에 따른 눈물은 하등에 쓸모가 없다. 고착만 더할 뿐이다. 마치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한 것 같지만 카타르시스가 있어 이를 무기처럼 즐겨 사용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아이는 자신이 장애가 있기 때문에 해야 할 것을 못해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 습관이 있다.

 

아무튼 나는 아이의 눈물 앞에서 겁이 덜컥, 났고 이 또한 준비가 필요하다며 아이를 말렸던 것이다. 아이는 마치 의연한 듯 자신은 괜찮으니까 선생님이 준비되시면 말씀하세요! 하고 돌아갔다. 당돌하기도 하고 무색하기도 하였다. 누구나 자신의 장점을 생의 최전방에 두고 이를 무기삼아 휘두르는 것처럼 자신의 약점 또한 그것을 방패삼아 보호막으로 쓰는 경향도 있는 것이다. 슬퍼 보이는 것 같지만 이를 즐기는 것이고, 안 됐고 딱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실은 그것을 핑계로 게으르고 나태해도 되는 것처럼 굴기도 한다. 무서운 일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이를 어디까지 받아야 하고 어르고 달래야 하는 것인지. 이어서 오는 아이의 글을 같이 읽고 뭐라 하는데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기 싫으니? 네가 쓴 글이잖아. 나 혼자 읽고 떠들면 무슨 소용이 있겠니? 나는 아이에게 부탁을 하듯 말하였다. 말하면서도 이게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싶었다.

 

그저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는 싫고 자기 심보로는 살기가 버거워 자신도 나태하고 게으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이라. 그러다 무슨 말 끝에 엄마가요, 하고 말하다 와락 울어버리는 것이니까! 마침 설교 원고 초안으로 잡은 본문의 말씀이 확장되어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았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7:9-10).” 왜 저들은 요셉을 팔았을까? 스데반 집사는 아브라함 이후 이삭과 야곱을 건너뛰고 요셉의 이야기로 넘어간 것일까? 저들이 요셉을 판 이유는 시기 때문이다. 저들이 예수를 판 이유도 시기 때문이다. 저들은 요셉의 말을 자기자랑으로 들었다(37:1-7). 곧 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자랑으로 들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8:23).” 예수님의 말씀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들으면 영락없기는 하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3:12-13).” 더 나아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10:30).” 그러니 이런 말씀이 주의 영이 아니면 무슨 수로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나? 저녁께 오는 아이는 같이 잠언을 읽고 기도할 때도 눈을 감지 않고 아멘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한다. 아니면 내가 너를 만날 이유가 없고, 감당할 힘도 없고, 내가 그리 대단히 사랑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말한다. 내가 뭐 좀 나아서 누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죽겠다.

 

그러니 애가 돌아가면서 선생님만 준비되시면 저는 괜찮아요! 하는 소리가 야무지고 당돌해서 나는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들은 시기하고 배척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나에게는 더도 덜도 없는 의지의 말씀이 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말씀을 곁에 두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 이것이 아니면 무슨 수로 하루를 살까? 내가 저 아이들을 어찌 만나고 위하고 마음을 더할 수 있을까? 나야말로 속수무책이라. 아이가 와락, 쏟는 눈물에 겁부터 났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애가 어찌 되면 어쩌나 싶고, 아이가 아닌 내가 저 아이의 눈물을 감당할 수 있겠나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10:7).”

 

이와 같은 말씀이 아니면 무슨 수로 감당을 하며 살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의 질이란 얼마나 척박하고 강퍅한가! 늘 우울감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자살충동을 느끼지만 곧 사그라진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 다른 길이 어딘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도대체 저는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는가? 이를 시기하는 마음으로는 어찌 저들 팔아넘기지 않을 수 있겠나?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5:13).”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7:9).” 시기하여 팔았으나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예수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이와 같은 말씀을 앞서 오전에 메모하고, 본문으로 정해 설교 원고로 잡아두었던 것이 오후에 오는 아이, 저녁께 오는 아이를 감당하는데 있어 중심이 되어주었다.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싫고 좋고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마음에는 온통 시기와 수치와 우울과 억울함과 분노와 갈등과 낙심이 가득한 것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나는 이를 알고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이를 어찌하면 아이에게 전할 수 있을까? 그 황폐한 심령에 주의 사랑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선생님이 준비되시면 저는 괜찮아요! 하는 아이의 말들을 나는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 안의 시기하는 마음은 그의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였던 것처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 죄를 위하여 오신 예수를 시기하였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의 무지함과 맹목적인 자기 갈구함을 어찌 멈출 수 있을까? 그 모든 게 결국은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싫은 것이다. 스스로 나태하고 게으르다고 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나는 무슨 수로 그 마음을 돌릴 수 있겠나?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다만 오늘 말씀에서처럼 우리에게는 소금 언약이 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 13:5).”

 

우리 안에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아이들의 마음을 농간하는 이 세상의 신이 있다. 그 부모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저들이 그처럼 마다하고 싫어하게끔 하는 하나님을 배척하게 한다. 그 마음에 수건을 덮은 것이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3:15).” 의도적으로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는 것을! 그러므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이는 그 마음이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57:20).” 번민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9).” 누구라고 별 수 있나?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통탄할 일이다. 그럼에도 저마다 자신들은 괜찮다고 하고, 병들었으나 아프지 않다고들 하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나는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도리어 나의 나 됨을 호소한다. 주가 아니시면 감당이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의 기도가 날 위한 것이다.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122: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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