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대하 12:1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7
왜 우리의 환난이 유익한가? 저가 세력이 강해지면서 하나님을 버렸고 백성들도 그리하였다.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곤고할 때보다 풍족할 때 길을 잃기 십상이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 성경의 원리는 엄연하여서 나의 출입을 지키셔야 한다. 어려움 앞에서 우린 눈을 돌린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1).” 그러할 때 애굽을 바라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대하 12:8).” 이를 알게 하시는 것이 또한 은혜이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2).” 여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굽이돌아 와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내게는 유익이다. 되레 배우는 게 많다. 주를 더욱 구하게 된다. 문득 하나님 나라의 자유함을 느낀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설왕설래해봐야 소용없다. 말을 보탠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고를 다해 이를 수 있는 길도 아니다. 특히 아이들의 상태나 그 배경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즉 ‘유혹의 기간’을 지난 후에 무엇에 애착을 갖는지를 보면 안다. 누가 청년들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대체로 목사나 권사 장로들의 자녀들이었다. 저들의 고민은 부모의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하나님을 갈구하였다. 믿음이 뿌리내리고 신앙이 자라는 데 있어 그만큼의 유혹의 시간이 걸린다. 그때 그 사람이 유혹에 이겼는지 패배하였는지를 알려면 그 마음에 무엇을 갈구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비밀은 결국 그리스도의 품성이 생겨나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씀과 기도는 필수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눅 9:28).”
종일 같이 있던 아이에게 날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때마다 말씀의 지혜가 아니면 어찌 아이들을 건사할지 나에게는 능력이 없다. ‘기도는 하나님의 실체가 인간의 삶에 접목되는 지점이다. 기도는 우리를 개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 출생 후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챔버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저마다 다들 자기 생각이 있어서 어찌나 그 고집이 황소 같은지, 뭐라 해봐야 소용없다. 기어이 누구는 먼 길을 돌아 돌아서 온다. 또는 이내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지혜로 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이 지혜는 새삼 생겨나는 게 아니다. 어쩌다 좋은 사람을 만나 얻게 되는 일도 아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그와 같은 지혜를 주신다. 아이는 결국 어디 서울로 다니던 교회도 그만두었다고 했다. 너무 멀고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아이가 이제 우리 교회로 올지, 혹은 그마저 하지 않을지.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만이 아실 일이다. 다만 나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나는 다만 십자가만 보고 나아갈 따름이다. 보낼 아이면 보내시겠고 감당할 수 있을 때 또한 맡기실 일이다.
그러는 동안 나에게는 다만 그리스도의 마음이 필요할 따름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이는 곧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아이가 오전에 일찍 와서 오후까지 같이 있으면서 두 아이를 곁에서 보았다. 같이 어울리고 마음을 썼다. 그 마음이 아이의 것이겠나? 또는 내 것이겠나?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다만 우리가 꿋꿋하게 주와 같은 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안타까워하고 마음이 쓰이고 같이 돌보고 주께 인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찌 가르친다고 생겨날 것이겠나?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어느 가까운 훗날 완고하였던 저들 마음에도 주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고로 그 마음에 평강이 넘쳐나기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내가 이룰 수 있는 대목이 아닌 것이다.
종일 그렇게 아이들과 같이 있었고 저녁께 어느 부부의 사역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가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당간당하다 싶을 정도로 남편에 대해 부정적이고 마음이 어려웠던 게 이제는 그의 역할을 존중한다. 같이 청년부를 건사하면서 집으로 초대해 밥을 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대목에서, 그게 참!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이 또한 기이할 따름이다. 그게 광야이든 가나안이든 덤덤하게 나아가다보면 주가 이루시는 세계에 대한 인내를 더하신다. 신기하게도 인내를 통해 비로소 감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께 감사하게 되는 것은 주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다만 그 지체이다. 여기 교회 저기 교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교회 너희 교회가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그 한 몸의 지체로서 섬길 따름이다. 이를 보고,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계 1:12).” 또한 맛보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묵상하며,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 뛰어갈 따름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119:32).” 이는 결코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셔야 할 일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러므로 내 안에 이는 안달하는 마음까지도 주의 것이 되기를.
저녁에 가정예배로 모여 말씀을 보기 전에 아내는 한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친정식구들로 마음을 끓였다. 작은 조카 녀석이 그 집에서 나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모양이다. 모친의 부재와 부친의 막연함과 조모의 구성진 집착과 손위 형제의 멋대로 구는 태도에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그저 나가겠다고만 하니 이를 그래라, 할 수도 없고 말아라, 할 수도 없어 처남 형님은 난감할 따름이다. 처와 자식 둘이 복음을 거절하는 상황에서 저는 외롭고, 이를 지켜보는 아내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만 태우는 것이었으니. 성경의 진리는 엄연하였다. 자신을 부정하여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랬을 때 우리가 한 몸을 이룬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화평은 십자가에 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자신을 무슨 동성애니, 독신이니, 누가 비혼이니, 싱글이니 어떠니 백 날 떠들어봐야 헛것이다. 십자가로만 이길 수 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5).” 다른 무엇으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니 어쩔 것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싫다고 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으로 대체하려 하니 속된 말로 갈 데까지 가 보는 수밖에!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한심할까? 누구는 맥없이 자살하고, 누구는 그럼에도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자기 것을 놓지 않으려 하고, 말 그대로 세상은 요지경인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말씀 붙들고 기도로서 서자. 무던히 또 묵묵히 주가 더하시는 하루하루를 살자. 나는 아이에게 이르며 서로를 위해 기도를 당부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7).” 곧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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