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대하 10:4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119:50
말씀으로 바로 세워지는 일이 귀하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56-57).” 그럴 수 있는 게 고난의 힘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거저 왔다 거저 가는 고난은 없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그로 인하여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72).”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게 한다. 그것으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74).”
말씀을 바라지 않을 때 사람의 말에 기웃거리고 그리하여 왕국의 분열까지도 초래한다. 앞서 다윗의 신앙이나 솔로몬의 업적이 한 세대를 다하기 무섭게 훼손되는 것을 본다. 어찌하여 다윗의 신앙이 바르고 온전하였는가? 저는 평생에 고난을 당한 자로서 이에 온전함으로 말씀만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75).”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81).” 곧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88).” 아무리 세상은 어떠하다 해도 주의 말씀은 끝이 없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96).” 그러므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 가만히 말씀을 음미하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실까? 우리를 ‘구원 받은 영혼들’로 만드시는 데 그치지 않고 영광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곧 우리에게 두시는 어떤 고난도 허투루 왔다 허투루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토요일에 오는 친구는 연말이라 특근이 이어져 전 주에 이어 오지 못했다. 주일도 못 지킨다는 말에 보다 강한 의지를 소개하였다. 한두 번 허용하는 대로 뒤로 밀릴 따름이다. 하고 안 하고는 저의 의지이겠으나 주의 인도하심을 바라였다. 다윗이 괜히 다윗이 된 게 아닌 것처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또는 우리나라의 신사참배에 따른 굳건한 결의도 실은 모두 ‘죽으면 죽이리라.’ 하는 데서 오는 결연함이었고 이를 붙드시는 말씀으로 인함이었다.
누구는 그러했고 누구는 그러하지 못했다. 주의 영광은 차별이 아니라 차등이다. ‘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면 그는 단지 구속의 놀라운 효력에 동참한 것이 된다. 구속은 완벽하게 완성되었고 마무리 되었다.’ 그러므로 ‘새사람을 입는다는 뜻은 우리의 자연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명령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 주님이 우리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도록 주께 충분한 기회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에서 밑줄을 그은 부분이다. 저마다 하나님께 바라고 주의 권능으로 이루지기를 원하는 것은 있겠으나 실제 철저하게 다스림을 받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주춤한다. 저는 길게 설명한 끝에도 그저 다 알지만, 자신도 안다는 말로, ‘알기는 알지만’ 하면서 여러 말로 어쩔 수 없는 사정을 더하였다. 내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저의 신앙은 나와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결코 스스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더욱 철저히 주께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우리의 연약함이 도리어 주를 더욱 바라는 강인함으로 자라나게 한다. 우리에게 더하신 사명이기도 하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그것도 내가 내 의지로 꾸려가야 하는 일의 것이라면, 굳이 그처럼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킬 게 뭐 있겠나?
어느 아이의 엄마 말처럼, 사는 데 있어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살면 위로가 될 뿐이다. 저이는 마치 자기 여식이 글방이 아닌 교회에 나오는 것에 대해 그처럼 너그러운 척을 했다. 아뿔싸! 아이는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올 때는 그처럼 열심이었더니 막상 엄마의 허용이 있고부터 흐지부지해지면서 오다 말다 하다 기어이 교회를 떠났다. 기껏 성경공부를 하고 세례까지 받았는데 오랜만에 와서 자신은 불교 쪽이 맞는 것 같다는 소릴 하였었다. 이는 나에게 있어 가장 어처구니없는 기억 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는 아이의 사춘기로 아이엄마는 늘 새벽기도에 열중하였다. 당시 남편과의 사이도 간당간당하여 곧 이혼을 할 위기였다. 가끔씩 내게 전화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하였다. 아이는 삐딱하게 굴었고 그처럼 애를 먹였다. 그러다 한참동안 연락이 끊겼고 어느 날 찾아와 이슬람교도가 되었다고 소위 그쪽에서 세례까지 받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학을 외대 아랍어과로 갔고 카이로로 유학도 갔다. 아이엄마는 아이가 행복하다면 자신은 괜찮다면서 나의 염려를 무안하게 하였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2).” 저마다 종교는 원하고 신앙은 좋은 듯 여기지만 고난을 마다한다. 곧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것은 오직 자신에 대한 권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양도하고 주님과 일치될 때 우리에게 부여된다. 그럼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그러므로 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권리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자기 유익, 자기 연민, 자기 동정, 자기 판단과 결단까지도 전적으로 주의 말씀이 하시는 대로 ‘나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와 통화하고 주일을 지키는 일에 대해 말하였으나 저는 그럴 수 없는 사회인의 애로와 직장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음을 토로하였다.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고상함이나 덕을 다 포기하기까지 주를 의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결코 우리에게 부여되는 연단은 이상한 게 아니다. 이를 즐거워하라는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 앞에서 나는 어떠한가를 묵상하게 된다. 누구에 대해 말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떠한가? 말씀을 제치고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너나없이 하나님께 기적을 나타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놀라야 하는 일은 아직 하지 않으신 일에 대해서이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102).” 그 맛을 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살아서 내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이를 마음으로 즐거움으로 삼는 것이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111).” 이에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7-148).” 곧 바른 것을 사모함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174).” 그러므로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175).” 늘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지만 그때마다 주의 긍휼하심이 항상 먼저였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나의 의지나 수고나 노력의 결과로써가 아니다. 오직 주여,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시 119:17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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