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대하 35:22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편 144:4
나름 열심을 다해 주의 백성을 위하고 주를 섬겼던 요시야다.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대하 35:7).” 그럼에도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22-23).” 이내 '자신이 하려는 일의 결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청종하지 못할 때의 결과는 비극적이다. 오늘 시편의 표현처럼, 사람 참 하찮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4).”
뭔가 대단히 이룰 것처럼 굴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요시야를 보며 나를 돌아본다. 그럼에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4).” 나를 위로하시는 하루였다. 아이가 월차를 내고 내내 조르듯 하여 같이 영화를 보러 갔다. 그럴 때 먼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생각하고, 돌아오며 생각하고, 생각하기를 아이가 돌아가고도 생각하다보니 아무리 선한 의도였다고는 하나 옳지 않은 것은 엄연히 옳지 않은 것이었구나 싶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이가 주일에 나오기만 한다면 알바 형태로 계속 우리 사이를 유지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러는 게 가까운 훗날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과 그럴 리 없다 해도 고작 우리 사이는 돈을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가 우선하는 일이어서… 내 안에 계속 볶이던 것이 그 때문이었나 싶었다. 어쨌든 아이를 속이며 아이의 버릇을 잘못 들이는 게 아닌가.
갑자기 눈물이 났고 안 됐고 서러운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그러니 애를 어쩐다? 측은한 마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말씀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쉽게 생각하는 게 뜻을 그르칠 수 있다. 내가 이 일을 대하는 데 있어 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정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가령 성경을 서로 타협하듯 ‘공동새번역’ 하든 ‘표준새번역’ 하든, 실상은 문자가 사람을 죽일 수 있듯이 사람으로 서로의 공감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는 게 중요하였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같이 읽는 내용이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어떠해도 설령 그것이 효과가 빠르고 가장 합리적인 것 같다 해도… 가령 집 밖으로 안 나오는 아이를 유인하려 거짓 알바를 꾸민 일 자체가 일의 순서를 바로 밟지 못한 게 아닐까? 아이엄마의 그러한 조바심에 나는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 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엄연히 다른 것이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이 생각하신 일이 엄연히 다른 것이었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리 허용을 했던 것이다. 그저 아이가 안 됐고 불쌍해서였을까? 아니면 내 안의 불순한 공명심이 작동하였던 것일까? 뭔가 된 줄 알고 그리 동조하였던 일인데,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그러니 내내 볶이는 마음으로 해오던 게 아닌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마 10:29).” 나야말로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아,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나는 자꾸 합리적이고 감상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니 이러면 되겠다, 싶은 마음에서 나는 실제 저들 가정의 근본적인 영적인 문제를 간과했던 것이다. 아이엄마의 오만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적으로의 분별력을 상실하는 일은 순간이다. 오늘 본문의 요시야도 이내 그 자리를 떠났어야 하는데, 될 줄 알았던 저의 안의 공명심이 저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게 된다. 즉 오늘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18).” 아무리 분별한다고 하나 지금은 희미하여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니 주께서 나를 따로 불러 세우시는 것이다.
나는 혼자 훌쩍거리며 주께 아뢰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말씀을 바로 보는 눈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성경의 언어는 도리어 우리를 해치는 문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달라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얼마나 자주 안 믿는 자들과 같은 결과를 좇고 바랄 때가 많은가? 단지 그 마음은 허망할 뿐인데, 무지함과 굳어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저들의 생각과 온전히 주를 바란다는 나의 생각이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어려움을 자처한 것이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아닌 건, 죽어도 아닌 거다. 이를 어찌 잘 무마하여 선으로 포장하고 위로로 삼는다는 자체가 악하였다. 나의 생각은 이에 말씀으로 굴복 당한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영광이 다툰다. 엄연히 이 세상을 권세 잡은 영의 영광이 있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세상의 영광이 하도 그럴듯하여 자칫 시선을 빼앗기면 ‘그게 왜 나빠?’ 하면서 돌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분간할 길을 잃는 것이다. 오늘 요시야의 최후가 이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련의 사태에서 다시금 나의 나 됨을 통렬히 깨닫는다. 내가 하려고 하면 영락없는데도 번번이 당하고도 또 그런다. 사람 참 바뀌지 않는다. 누구 욕을 하랴. 내가 그때 아닌 건 아닌 거라 말해주었어야 하는데, 그저 아이가 안 됐다는 생각에서 눈 감고 귀를 막았던 게 이 모양으로 나를 볶는 일이 된 것이니! 아이를 생각하면 공연히 마음이 먹먹하고 답답한데도 ‘알바 사이’는 오늘로 끝내는 게 낫다. 주일을 권하고, 함께 주 앞에서 하나 되기를 말하여야 하는데, 주의 영이 나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기를…. 이대로 계속 끌어가면 더 큰 문제가 될 것을 알았을 때, 여기서 멈추는 데 있어 가장 선하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주가 아니시면 내가 또 이 일을 어찌 수습하오리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이를 알게 하시려고 오늘의 나를 여기에 두시는 것임을.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다른 복음은 없다. 우리가 잘 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복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주의 영으로 살리라는 말씀 앞에 선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주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다른 무엇도, 누구의 인정도 내가 이룬 성과도 그 어떤 호의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8).” 말씀의 위로가 크시다. 그러므로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9).” 죄는 죄다. 죽었다 깨어나도 선은 선이듯이 죄는 죄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10-11).” 고로 내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12).” 그것이 오늘 내게 더하시는 생각이었다. 아이가 어찌될까 하여 두려운 마음에 그러했다 해도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곧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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