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대하 34:33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8
함께 동행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그 길은 달라진다. 어떤 통치자를 주로 삼느라, 친구가 어떠한가, 이웃하는 이가 누가인가 할 때의 그 삶도 다르지 않다. 그것이 부모 자식 간의 일이면 더욱이 난감하다.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대하 34:33).” 말씀을 여러 번 되뇌어 읽다가 마음이 서늘하고 암담하다. 저녁께 누구와의 긴 통화에서 왜 아이가 그러한가 하는 것을 실감하였다. 아이가 불쌍하고 서러웠다. 진이 빠져 통화를 끊었다. 더욱이 아이를 교회로 보내도 거기는 싫다, 너무 깊이 빠져들까 봐서 그렇다, 하는 말에 기가 찼다.
아,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8).” 말씀으로밖에 위로를 삼을 길 없다. 사람 참 그렇다지만 이런저런 말이 이어질수록 왜 아이의 영혼이 병들어 힘에 겨운 날을 사는가, 이해가 되었다. 뭐라 더 얘길 해봐야 큰 소리만 날 것 같아서… 나야 그렇게 외면하고 말면 그만이라지만 아직도 긴 세월을 동행해야 하는 아이는 어쩌면 좋을까? 그래도 엄만데… 난감하여 말을 접었다. 앞서 아이의 반응은 의외였다. 단지 ‘알바생’으로의 관계를 청산하고 함께 믿음 생활하자, 보다 깊은 사이-하나님과 화목하는 사이로의 길을 제시하자 불현듯 자신은 동성애자이고 기독교는 이를 반대하는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다들 왜 이러는 걸까? 너나 나나 죄인이다. 네가 어떠하든 내가 믿는 하나님을 너를 사랑하신다. 네가 이것을 조금만 맛보아도, 나는 이성애자니, 동성애자니, 독신주의자니, 낭만주의자니 하는 따위의 것이 얼마나 다 헛소리인지 알 게 된다.
그리 말해주는 것을 알아들었을까? 아이는 마다하지 않았고 우리의 관계가 지금과 다른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데 좋다고 하였고, 당장 답하기는 어려워도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같이 하겠다고 하였다. 의외의 답이었는데 그 엄마의 뻘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다 안다, 다 생각하고 있었다는 투의 모든 자기위주의 해석으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었다. 아, 누가 우리 영혼을 위로해줄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4).” 내가 언제 저를 보고 아이를 대했나, 생각하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성질 같아서는 욕을 해대고 다신 상종을 하기 싫은데, 어쨌든 아이가 있으니 보내시는 중이라 참고 견디자. 주께서 나와 동행하신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바울은 이어서 말하였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 주를 바라고 의지한다는 것은 막연한 게 아니고 추상적인 것도 아니며 그저 설교의 한 대목으로 들려주는 말로써의 전부가 아니었다. 실상이다. 이 지긋지긋한 실제이다. 누가 같이 토요일에 온다는 것도 그러지 말라고 하였다. 나는 솔직히 노닥거리듯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른 교회를 가면 갔지 거기는 안 가! 애도 너무 선생님이랑 밀착되면 안 되니까 싫어, 거기는 안 보내! 하는 소리에 나는 질렸다. 그리고 자기 계획에 다 생각하고 있었다는 어느 교회, 누구와 같이 내년 언제쯤 하고 이어지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는 주의 남은 고난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오늘 내게 두시는 ‘자기 십자가’란 이런 게 아닐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아니면 내가 어찌 저런(?) 멸시와 무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욕이 올라오는 걸 눌러 참았다. 당장이라도 때려 치고 싶은 것을,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는 다 목적이 있음을 이제는 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오히려 더 이 아침의 말씀이 진귀하다. 그러게, 말을 섞지 말았어야 하는데 공연히 통화를 했다. 더는 말을 말자, 혼자 그리 마음을 진정시켜 내가 삭힐 수 없는 분을 어디에 풀어놓겠나? 성경은 내게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신다고 한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후 2:9).” 내가 좋을 때, 존중받고 인정받는 것을 위한 게 아니었다. 순종이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인데, 이는 ‘이것까지도’ 돌려드리는 일이다.
괜히 억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분이 나지만, 아이를 생각하면 긴 한숨뿐이라. 그래서 네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생각하니까 마음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안 온다고 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았겠나? 그래도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이가 좋아요, 하고 나름 신중하게 대답을 하였다는 데 있다. 함께 가자, 할 때 내가 저와 동행을 권하는 까닭은 내가 믿고 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네가 어떠하든지 너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하고 말할 때 아이는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들었을까? 좀 우스운 표현으로 섣불리 또 예단할 수는 없겠으나 아이의 그 대답에서 내 안에 이는 기쁨이란, 가히 천국이 이런 것일까? 하는 정도였다. 참으로 의외였다. 아이야말로 싫다고 할 줄 알았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고후 7:15).”
그럴 수 있겠구나! 내가 아이를 보고 하는 게 아닌데 하물며 그 애 엄마의 몰상식한 태도에 기분 상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잘 알아서 될 수 있으면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내가 나설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저와 싸워 설득하거나 굴복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새삼 또 깨달을 수 있었다. 되돌려 나에게서 나는 냄새를 염려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 이것까지도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나태내시는 하나님’이시었다. 내가 애써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죽자, 나의 상한 마음과 깊은 앙금과 서러움에 절어 있는 마음이여 죽자.
왜 이처럼 괴로운가했더니 그것까지도 내 주장이 되어서이다. 아이가 오고 안 오고, 하물며 예배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아이엄마와 한 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고 어떤 화가 또 슬픔이 나서 씩씩거리다가 알았다. 어쩌면 이게 모두 내가 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구나! 사는 게 고통스러운 까닭은 기어이 자신이 살려고 하니까 그런다. 받은 바, 용서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고후 2:10).”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자. 저를 내가 이겨야 하는 일도 아니고 돌이켜 내가 저를 구원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할 수도 없지만 하려고 하는 것도 교만일 뿐이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그 자체가 말이다. 주가 하실 것이다. 교회도 안 가면서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죠!’ 하는데, 나야말로 혀를 깨물었다.
말을 말자.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 다만 기도뿐이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괜히 좀 서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여 저녁은 굶었다. 전날에 볶였던 것처럼 괜히 속만 끓일까하여, 그저 돌아누워 주님, 하고 주의 이름만 되뇌었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시 143:7).” 나는 그저 이 정도밖에 못되오니,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8).”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0) | 2019.12.20 |
---|---|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0) | 2019.12.19 |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0) | 2019.12.17 |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0) | 2019.12.16 |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0) | 2019.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