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대하 33:12-1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시편 142:3
어쩌면 우리가 온전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런 우리를 다시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란 참으로 기묘하시다. 가령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조건도 달지 않으셨다. 우리가 타락의 길을 갈 때도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향하신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함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실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악을 행함으로 징계하시고 징계로 인하여 돌이키고, 돌이킴으로 다시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한정 없이 드러낸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 33:12-13).”
이 원리가 사랑이라면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나도 그처럼 용서와 배반을 되풀이하며 살았으면서, 오늘에 이르러 누구를 그리 위하고 대하는 일에 있어 쩔쩔매면서…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시 142:3).” 나는 나의 이율배반적인 마음으로 인해 상한다. 아이엄마도 어디 알바를 나가서 근근이 아이에게 주는 ‘알바비’를 입금하는 것으로 알았다. 어느 정도는 기꺼운 마음으로 무얼 받을 생각은커녕 ‘안 됐다’ 하는 심정으로 점심도 못 먹고 오는 아이의 끼니를 챙겼다. 그렇다 해도 어떤 변화는커녕 아이는 오히려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것만 같아서, 지난 금요일에는 기도해라, 너라도 당장 교회 나가라, 하는 소릴 아이엄마에게 했었다. 이를 내가 못하겠다는 소리로 들은 것인지, 오는 토요일에 누구랑 들러 같이 저녁을 먹자는 둥 늘 지나고 간신히 보내오던 알바비를 하루 뒤에 입금하였다. 그냥 그런가 했는데, 어제는 뜬금없이 20만원이 입금 되면서 ‘2주치분’이라 명시하여 부쳤다. 이게 뭐지? 하다가 서서히 기분이 상하면서 하다못해 애 밥값이라며 붙였어도 시원찮을 텐데, 앞으로 알바비 ‘2주치분’을 선입금했단 소리 아닌가? 이게 진짜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지!
그렇잖아도 나는 더 이상 못하겠어서 ‘주일에 나와라.’ 하는 소릴 언제 해야 하나 벼르고 있었다. 아니면 기약 없는 아이의 나태와 자기혐오와 그에 따른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기변호에 대해 나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이건 ‘알바’라는 명분으로 오는 아이다 보니 괜한 말을 할 수 없다. 소위 선생으로서 뭐라 훈계할 수도 없다. 곧 이를 자신의 권리로 안다. 상대의 마음도 당연히 자기 몫의 값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 애에게 글 써라, 검정고시보자, 공부해라, 삶을 가치 있게 살아라, 하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어서 그저 나만 속상해하고 있었는데, ‘2주치분’이라니! 도대체 이런 것들을 내가 어찌 당해내겠나 싶은 것이… 기껏 괜찮던 속이 급체 때 오는 현기증과 울렁거림처럼 볶여서 일어나 약을 찾아 먹고 안정제까지 한 알 삼킨 후에야 다시 잠을 청하였다. 내내 나 혼자 생각이 많다. 당연히 ‘하나님의 종은 다른 사람들의 죄악들을 볼 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이 일을 이루셨으니 나는 이 땅의 그 누구에게도 실망할 수 없습니다.’ 하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에 밑줄을 긋고 여러 번 읽었다.
다른 방법은 없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이를 통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려 하심인 것에 대하여, ‘즉, 우리는 예수님처럼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성결하게 되었다.’ 나는 주께 기도하기를 내가 지치지 않게 해주십사 하는 것이다. 누가 오전에 오는 아이를 두고 그 가족들이 이내 포기하고 방치하기 일쑤라며 그 병과 관련된 어느 가족 모임 카페를 알려주었다. 나는 차마 가입은 할 수 없어 몇 편의 자기고백을 열어보다 접었다. 나야말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골백번이라. 또 신발을 샀고, 안경을 새로 했으며, 반지를 맞추고는 내내 기다리며 안달이다. 병적이라는 말이 그대로 해당한다. 같은 소릴 되풀이하는데도 소용이 없다.
이때 ‘모든 문제를 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후 그 차원에서 거룩한 삶을 습관적으로 살아내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누구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아름다운 가게’라는 데로 빙 돌아 산책을 하듯 조금 걸었다. 가게 안에 들어가니 아이가 물었다. 뭐 사시게요? 나는 그냥 실내를 둘러보며 가격을 보여주었다. 7500원 3000원 15000원 … 아이는 가격을 보고는 놀라더니 금세 중고라는 걸 알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와 걸으며 이야기했다. 너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척척 살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이 훨씬 많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몇 십만 원짜리 패딩을 입고 있지만 누구는 저렇게 남이 입던 것이라도 마음껏 살 수 없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 줄 아냐? 아이는 대뜸 안다고 대답했다. 더는 말 안 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아이와 헤어졌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하실 것을!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어쩌면 내게 요구하시는 ‘십자가’는 이런 것이 아닐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새로 개업하는 옆 사무실에서 우리 쪽 창문에 자신들 상호를 썬팅하는 작업을 아이가 돌아가는 시간에 맞춰서 하였다. 창을 열어두고 작업을 하였지만 무슨 약품 냄새 때문에 관리실에서 올라오고, 나는 책상을 한편으로 밀어주고 시간 반을 참고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짜증은 났다. 성가시고 귀찮은 것이다. 뒤처리를 하는 데 화가 자꾸 올라왔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거절을 하지, 그러지도 못하고 혼자 앓는 식이니! 이게 무슨 선이 되겠나 싶었다. 나야말로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아이를 내 품에 안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밉고 싫고 성가시다.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딸애가 ‘주의 마음에 붙들려 이 일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였다.
붙들려! 말 그대로 붙들리지 않으면 어찌 해결이 안 될 일이다. 나나 저 아이들이나, 그 엄마들이나 이 모진 세상이나 다들 그저 사느라 사는 데 급급할 따름이다. 우리 신앙의 역설은 사람을 참 답답하게 만든다. 주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점점 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교회로 나오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다. 이게 가만 보면 점점 더 고착될 따름이다. 저 아이는 ‘알바’로 오는 신분이라 굳이 나의 말에 귀 기울일 게 없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군다. 고마움을 상실한 마음이다. 고마울 게 없는 것이다. 이제 눈치를 챘을 법도 한데, 그만큼 모른다면 아둔한 것이고 알면서도 저러는 것이면 고질적인 문제다.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대하 33:10).” 사랑은 무던히 퍼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11).”
잠자리를 뒤척이며 나는 내내 주님의 마음을 바라다, 그 마음이 내게도 힘에 부쳐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어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내가 저 애를 구원할 수 없다. 나의 희생으로 저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런 마음이라면 이보다 더 악한 마음도 없을 것이다. 나는 ‘2주치분’ 앞에서 결정해야 했다. 그럼에도 계속 그러려니 하고 참고 또 기다리며 가야 하는 일인지, 엄연히 선을 긋고 내 중심을 바로 해야 하는 것인지. 그 기준은 주일에 오는 것으로 하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예배에 나오고 말씀이 들어가야 뭐가 되도 된다. 지금처럼 그러려니 하고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는 게 아니라 그 끝이 너무 빤하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내가 의사로 아이를 대하는 게 아닌 이상, 우리는 환자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애도 애 엄마도 자신들은 아무 문제 없는데 내가 괜히 그런다고 하니, 나는 환자로서 내가 아는 의사를 소개하는 사람일 뿐 내가 저의 환부를 도려내고 치료할 수는 없다. ‘같이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하는 소리는 극히 낭만적인 발언이다. 환자는 그래도 환자다. 치료가 필요한 것이지 동정이 필요한 게 아니다. 지금이 중요한 것이지 전에 어땠는지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밤새 뒤척이다 일찍 깨어서 주 앞에 앉았을 때의 어떤 서러움… 주님은 아시지요? 하는.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욥 11:11).” 하면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이란,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나는 철저하게 나는 할 수 없다는 지점에 자꾸 세우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럴 거면 아예 이와 같은 일에서 벗어나게 하시던가, 아니면 뭔가 가시적인 성과를 동원하시던가. 그러다 문득 누가 잠언 1장을 카페에 적어 올린 것을 보았다. 박사학위에 교수 임용을 준비하는 이가 ‘성경은 어렵다’는 이유로 ‘쉬운 성경’을 들고 옮겨 쓴 것이다. 저는 지금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으니 자신이 행하는 열심과 선행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영락없이 우리는 나약한 사람이라!
오직 주만이 아신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시 37:18).” 주만 보고 하자. 애가 오든 안 오든, 애나 애 엄마가 받아들이든 말든, 아니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저들을 예배로 부른다. 새로 온다는 누구에게도 먼저 그 얘기부터 하였다. 교회에 다녀야 하고 예배에 나와야 한다. 함께 신앙을 붙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감당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저의 성매매업종도 버려야 한다! 과연 이번 주 금요일에 그렇다는 데도 아이를 데리고 저가 올까? 안 온다 해도 신기할 거 없고 온다 해도 신기할 거 없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가에 달렸다. 환난은 우리로 겸손하게 한다. 천하에 므낫세도 엎드렸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대하 33:12).” 우리가 엎드리니 할 게 뭐 있겠나? 기도밖에 없지 않겠나?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13).”
나는 이 원리에 붙들릴 따름이다. 결국 그 부모와 가족들도 포기하고 더는 방치하기 마련이라는 ‘아이의 병’을 두고 나는 어쩔 것인가? 내게는 주가 주시는 끈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여전히 자신의 나태함을 사랑하는 아이에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겠나? 기어이 나는 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주께 겸손히 기도하는 수밖에! 오직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시 14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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