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대하 32:24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편 141:3
아침 일찍 친구가 카톡을 하였다. 요한복음 8장 9-11절 말씀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며 그 의미를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의미와 지시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동시에 봐야 한다. 특히 숫자에 대해서는 무리한 해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나는 친구에게 이를 설명하고 그러한 궁금증을 대견하게 여겼다. 생전 그런 데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를 통해 알고자 하는 저의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다.
그런 거 보면 말 그대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사람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오늘 본문에서의 히스기야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한결같은 사람은 없다. 주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사람과 사람 사이’ 이보다 더 허망한 사이는 없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대하 32:24).” 하긴 그 마음이란 게 본인조차 어쩔 수 없는 것이겠으니,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25).” 나는 종종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아찔하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약 3:9).” 두 마음이 늘 공존하는 까닭이다.
한 입으로 찬양도 하고 저주도 한다. 사느라 죽기 살기로 먹고 사느라 서로의 관계는 소원해지고, 주를 의지하며 함께 주를 바라였던 시절을 잃어버리기를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는 것이었으니… 아뿔싸, 어찌 되었던 그 생의 끝은 여기서 저기까지인 것을! 서로가 서운하였든 뭐가 어떠하였든, 나는 저녁께 아버지의 문자에서 누가 무슨 중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말에 선뜻 기도하겠다는 말을 보탤 수 없었다. 사느라 그러는 동안이었다 해도 행여 그러한 일에서도 먼저 연락을 못하고 기도를 나누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데서 안타까웠다. 공연히 쭈뼛거리며 생각을 얹다가 말할 기회도 놓쳤다. 오로지 주의 은혜뿐이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대하 32:26).”
나는 충무공의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절규어린 말을 사랑한다. 결코 나는 누구보다 낫다고 여겨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더한 위인이라, 과연 나의 남은 생은 한결같을 수 있을까, 하고 혼자 주 앞에서 절규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어려울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잘될 때도, 고통이 따를 때나 기쁠 때나, 병이 더 위중하거나 낫거나, ‘어떠하든지’ 과연 나는 주님으로만 한결같을 수 있기를.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의 영광이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너를 대하고 나를 대하는 데 있어 우리가 주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늘 두 개의 마음이 내 안에 있어 하나는 주를 바라지만 하나는 늘 세상을 갈구하기도 한다. 나는 저의 병이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이미 죽은 나사로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어서 어려우나 이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 하필이면 어제 아침에 그 집 큰 딸아이가 어디서 어찌 사는지, 혹시 아는가 하고 아버지가 물으셨고, 나는 그 애가 저의 조모 장례식장에서 누군가를 스폰서로 두어 어디 중소지방에서 아웃도어 매장을 크게 하고 있다는 소식과 하나님 없이 사는 것에 대해 굳이 돌이킬 마음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작은 애는 어디서 잘 산다는 소리를 아버지께 들었고, 저들을 찾아가 얼마 만에 한 번씩이라도 축복 기도를 하고 오시는 일에 있어서도 저들의 바쁜 일정과 시큰둥한 마음으로 조심스러워하던 것을 느꼈다.
그러니 이 일이 그저 단순하게 저이 한 사람이 살고 죽는 일로 그치지 않기를 기도한다. 행여 그 중한 질병이 또는 죽음마저도 헛되지 않기 위하여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마음이었으면… 특히 저 집 큰 애의 죽었다 살아난 옛일을 떠올리며 돌이켜 주를 바라는 자리로 돌아오기를… 그러한 소식은 아침에 친구의 변화된 모습에서 새삼스러웠고, 이는 모두 다 주께서 행하시는 일임에 놀라웠다. 친구는 늘 내게 말하기를 목사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러고 있으면 되겠나? 교회답게(?) 간판도 하고 반듯하게 꾸려야 사람들도 오고 헌금도 들어올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기도 하였으며. 그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겨 ‘궁여지책’으로, ‘자신의 무력과 게으름을 회피’하느라, ‘책임 전가’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그렇듯 뼈 때리는 소릴 해대던 친구가 ‘모친의 죽음’으로 인하여 죽음 너머의 생을 돌아보게 되었고, 곧 있으면 닥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염려하게 된 것이니! 그래서 저는 성경이 궁금하게 되었다.
결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과 별개로 여기며 사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저들에게는 한낱 책이고, 허황된 한 종교의 경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결국은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일인가? 나는 새삼 누구의 소식 앞에서, 그처럼 거리를 두고 불편해하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씀이 배제되면 고작 스쳐지나가는 계절에 불과한 일에 대하여, 부디 그 허망함에서도 주는 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앞서 요한 사도는 그래서 여섯 개의 표적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요 2:1-11), 둘째는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는 기적(4:46-54), 셋째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서른여덟 해 된 불구자를 고치시는 기적(5:1-18), 넷째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6:1-15), 다섯 번째는 풍랑 위로 걸어오시는 기적(6:16-21), 여섯 번째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9:1-11) 그리고 친구가 궁금하여 물었던 대목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이 행해진다(11:1-54). 요한은 결코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강조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다시 충무공의 말을 가져오면, 이에 그저 살고자 하는 것이면 죽는 게 낫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죽고자 하면 오히려 산다. 살아서 살고 죽어서도 산다. 오직 우리로 믿게 하려 하심이다.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주일 날 아침 일찍 친구로부터의 뜬금없는 성경에 대한 질문과 저녁께 아버지가 들러 심방을 가셨던 누구의 중한 질병 소식을 두고, 나는 새삼 주의 거룩하신 인도하심을 묵상하였다. 이에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신다. 사람들은 조롱할 따름이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요 11:35-37).” 아, 우리 사람의 이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이해력과 판단과 자기 기준의 한없이 가벼운 인생을 어쩌면 좋을까? 이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40).” 곧 우리의 살고 죽음은 모두 이에 달렸다. 다른 의미가 없다. 나이 들면 병들고 죽는다. 또는 사고로 죽고 생각지도 못한 지경에 이르러 죽는다. 기어이 갈 데까지 가보고서야 알게 되는 인생의 별 수 없음 앞에서 나는 치를 떤다. 내가 그러했고, 지독하게 그러했었던 날들을 돌아보면 나의 남은 모든 생이 기적이고 표적뿐이다.
나는 오늘 시인의 기도를 음미한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행여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말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시기를. 나의 생각은 늘 악하여서 주의 뜻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사오니, ‘내가 항상 기도하리이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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