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에스라 5: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50:1
앞서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미뤄진 성전 재건의 일이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로 다시 이루어지려는 데 있어, 새로 부임한 총독 닷드내가 이에 대한 합법성을 따지느라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이다. 그런 거 보면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마땅하다. 누구와 통화하다 ‘너무 애쓰며 그리 열심히 살지 마라.’는 내 말이 꼬리를 물면서 그리 이야기는 진행된 것이다. 저는 그것을 따로 구분 짓는 게 옳지 않으며 누구나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그 가운데서 믿는 자가 두각을 나타내어 안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의 생각은 다르다. 저의 생각에 반은 동의한다.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 삶이란 엄연히 세상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를 거스르게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사람이 그렇게 옳지 못하다. 일관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삶을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 정직하지 못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며 마치 이리 가운데 보내는 양과 같다고 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그와 같이 보내심을 받은 데 있어 무엇보다 철저하게 주를 의지하고 주를 바라는 삶이 성실함으로 또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그에 동의한다. 한데 저들처럼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얼마나 애써 수고하며 자기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러는 데 있어 또한 얼마나 적당히 ‘세상적인 것’에 노출되고 타협하고 허용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다 극복하고(?) 믿음으로 굳건하여서 두각을 나타내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 마음이 또 얼마나 위태롭게 자기 교만으로 사로잡히게 되는지,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너무 애쓰지 마라’ 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박사 학위까지 땄고, 교수 임용을 기다리고 있고, 그만큼 수고하였으니 쓰이는 바도 다를 것이라고 소원하고 있었다. 글쎄… 그만큼 자신을 자신하는가? 나는 차마 묻지 않았고 마침 아이가 와서 대화를 거기서 중단하였다. 소위 교회 안에서의 엘리트주의, 엘리트의식이 얼마나 거치는 돌이 되는지 모른다. 있는 자들은 있는 것을 내어놓지 않기 위해 얼마나 스스로를 구축하는지 모른다. 오늘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교회의 형태도 그와 다르지 않다. 지혜자는 말하길 결코 인생은 인생으로 그 벽을 넘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전 2:1).” 저의 결론은 헛되다는 것이다. 얼마나 나름 애쓰고 수고하였는가? 그런데 저는 그것이 다 일시적일 뿐이라고 한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2).” 마침 아이와 같이 성경공부로 읽은 내용이 앞서 내가 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경공부도 저들이 하는 것과 내가 아이와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나는 내가 아는 말씀으로 그 근거를 삼고 저는 저가 아는 말씀으로 근거를 삼을 것인데, 저의 주장도 반은 옳은 것이나 반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신이 그만큼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 인생의 보람이란 그만큼 헛될 뿐이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전 2:3-4).” 시편에서는 우리 인생을 그저 입김과 같다고 그 가벼움에 대하여 말하였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가령 예수님은 인생을 바꾸어 보다 나은 삶, 양질의 삶을 얻고자 하여 사람들을 계도하려 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대의 지도자들과 로마의 권세 잡은 자들과도 좀 어울리셨어야 한다. 한데 우리의 최종 목적은 여기가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바울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즉 내가 학벌로 또는 탁월한 재능으로 이 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을 세우려 하였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나? 성경은 말하길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내 아들에게 또한 내게 보내시는 아이들에게 자주 들려주고는 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
그 말에 저이가 발끈한 것인데,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나름 으뜸이 되고자 하여 열심을 다하는 것에 대하여 그 숨은 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이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벧후 2:13).” 공부를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공부해야지! 직장인의 본분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니 일 해야지! 다만 그 열심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그와 같은 성공 여부로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려 한다면 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또는 그러자니 얼마나 알게 모르게 타협하고 허용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지, 다들 잘 알 거 아닌가? 안 믿는 사람들과 사업을 하고, 장사로 부를 얻으려면 그만큼 탈세와 불법적인 요소도 요령껏 무마해야 한다. 그 모든 문화를 초월하면서 과연 이 땅에서 으뜸이 될 수 있다?!
전도서는 그 인생의 주인이 엄연히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을 일깨운다.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전 2:9).” 그것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우리의 자랑은 저들의 자랑과 다르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우리 사람은 그렇듯 의롭지 못하고 굳건하지 못하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종종 저의 기도는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식이다. 자기 수고와 애씀을 가지고 주 앞에 섰을 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 결과는 참혹할 따름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그럼 무엇으로 사는가?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산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결국 새 생명으로 산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전에 살던 그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 행하여야 하겠나? 먼저는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천하의 다윗이나 솔로몬도 다만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도 저의 탁월한 학식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으로 살았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내 다메섹에서 고꾸라지기까지 저의 열심이 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하였고, 저의 학식이 저로 예수를 박해하는 자로 살게 하였다.
결국 우리 인생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0-11).” 얼마나 솔로몬은 원 없이 살았던가? 그러니 그게 만족함을 주었던가?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우리가 이 땅에 쌓아둔 공적이란 지푸라기와 같은 것일 뿐,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7).”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자기 노력으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전 2:12).” 모든 게 다 앞서 간 이들의 발자취를 따를 뿐이다. 애써 수고한다고 새 것은 없다. 모든 시대마다 자기들의 새 것에 다 열광하였다. 그러므로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열심히 살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 땅의 공동번영과 나라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싸우라고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오히려 이 땅에서의 자랑은 허망할 따름이다.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전 2:13).”
나는 이제는 누구더러 열심히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열심히’와 ‘성실히’는 엄연히 다르고, ‘재능’과 ‘달란트’는 다르다.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재능은 그릇된 길로 이끄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는 하나든 둘이든 다섯이든 같다. 어느 게 우위를 점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하나님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끌어가지 않으신다. 도리어 왕궁에 있던 모세를 누르고, 혈기왕성하던 다소의 사울의 그 오만방자함을 죽여서 사용하였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오히려 지혜자는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지혜라고 하였다(전 2:14-18).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18).” 이 땅에 삶은 살기 위해 사는 것이겠으나 우리의 삶은 죽기 위해 사는 일이다. 이 땅에서의 열심은 그 성과를 바라는 것이겠으나 우리의 열심은 영생에서의 안식을 위한 상급을 사모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그래서 나는 죽어라 하고 공부하여 학위를 따고, 죽어라 하고 돈을 벌어 더 나은 양질의 삶을 추구하고, 죽어라 하고 장사하여 ‘서민 갑부’가 되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한술 더 떠서,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49:17).” 그러므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이는 우리가 믿음의 상속자로 사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19).” 다 헛되다. 세상에서의 모든 추구와 가치와 그 의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의 것이 아니어서 이것도 헛되다. 그래서 더욱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말씀으로만 산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이는 청지기로서의 삶이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전 2:20).” 어느 것도 내 것은 없다. 건강도 돈도 지식도 자식도 내가 추구하여 이룬 모든 성과들도 궁극적으로는 내 것이 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를 맡은 자들일 뿐이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차라리 저의 열심으로 남을 위해 사는 게 낫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래서 나는 나의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다.
삶을 허비하지 말자.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1-23).” 죽어라 하고 사는 일에 나름은 반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일평생 근심과 슬픔뿐임을 성경은 엄연히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을 따름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6-7).” 그러므로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이는 모두 헛될 뿐이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4-26).” 용 써봐야 소용없다. 난 안 그래! 하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 마음은 교만이라. 돈은 그러게 돼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삶은 그러게 돼 있고, 사람들로부터의 칭송과 칭찬은 그러게 돼 있다. 우리는 영락없이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은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시 150:2).”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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