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9 주일
행 17:30-31, 전도서 2장
믿을 만한 증거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들어가는 말
지난 주일 우리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의 설교 서두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다. 요셉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하여도 살펴보았다. 곧 우리는 숨길 수 없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3-14).”
이는 결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소금은 그 맛과 역할로 극심한 부패로부터 저항에 부딪친다. 빛은 항상 어둠의 저항에 시달려야하고 들끓는 날벌레들로 골치를 썩는다. 불 켜진 산 위에 있는 동네는 길 잃은 나그네의 표식이 되고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안식이 되어주지만 필연적으로 뜨내기와 술주정뱅이와 시정잡배들이 꼬여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과 교회가 져야 하는 고난은 숙명이다. 바울은 이를 기쁘게 받았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의 자세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오늘 우리는 그러면 연종과 연시에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전도서 2장에서의 지혜자의 길라잡이를 주목하려 한다.
믿을 만한 증거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제목처럼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 대해 운운할 것 없다. 유난히 성경을 그리 접근하는 경향들이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위해 ‘정하신 사람’을 보내셨고, 다시 살리셨고, 이를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역사적인 증거’로 두셨다. 왜냐하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우리의 삶과 일반인의 삶은 무엇이 다른가?
엄연히 세상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차이다. 이 둘은 서로를 거스른다. 같을 수 없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사람은 그렇게 대단하지 못하다. 이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영적으로 강인한 사람이거나 혼합주의에 편승하려는 사람이다. 성경은 일갈하였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8).” 이는 결코 우월주의적인 입장에 서라는 게 아니다. 그런 가운데 지혜자는 전도서 2장에서 뭐라 증거하는가?
1. 인생으로는 인생의 벽을 넘을 수 없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1).”
저의 결론은 헛되다는 것이다(1:2). 바울도 단호하게 증거하였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즉 이 땅의 기준으로 싸우는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인생 뭐 있어? 먹고 마시고 죽자 하겠다.’ 이 말이다. 성경은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2. 이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2).”
시인은 고백하였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곧 일반인들은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우리를 흔들어놓고는 한다(벧후 2:13). 우리는 멋모르고 삶의 즐거움을 저들의 것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3. 인생에서 찾는 보람은 헛될 뿐이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3-4).”
지혜자는 누구보다 사는 보람을 세상에 두었더랬다. 그래봤다. 해볼 거 다 해봤다. 그러나 인생이 참으로 부질없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시 62:9).”
4. 또한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9).”
애써 수고하고 남들보다 창성하여 나름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그런 사람일수록 회환이 깊어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식으로 주 앞에 선다. 그런 자들에 대하여,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 결과는 참혹하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 그럼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①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② 반드시 새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③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 이제 우리는 어찌 행하여야 하는가?
① 먼저는 탐욕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②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③ 성령 충만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5. 결국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0-11).”
예수님은 이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 가령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서른세 살 된 몽상가 청년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으로 그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다. 스물아홉 살 나이에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지 못하고 인디언마을에서 폐렴에 걸려 숨진 브레이너드의 죽음이나,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12년간 옥살이를 하며 ‘천로역정’을 지었던 존 번연이나, 고질적으로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찬송시를 지었던 윌리엄 쿠퍼의 생애가 결코 헛되지 않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죽음까지도 의미가 있다.
6. 우리 인생은 우리의 노력으로 새로 일구는 게 아니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12).”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때가 되면 우리의 공적은 밝혀질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은 풀과 같고 짚과 같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7).”
7. 우리의 지혜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18).”
지혜자는 단언하였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7:1).” 그래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왜 그럴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8. 우리는 믿음의 상속자다.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19).”
우리의 핵심은 ‘믿을 만한 증거’뿐이다. 그래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 믿음을 왜 가르쳐야 할까?
9. 우리는 다만 인생을 맡은 청지기이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20).”
어느 것도 내 것이 아니다. 거저 받았다. 건강도 돈도 지식도 자식도 다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이에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곧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해 사는 일보다 낫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10. 그래서 이제 우리는 허비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23).”
죽어라 애쓰며 사는데도 사는 게 늘 죽을 맛이다. 일평생 근심과 슬픔뿐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6-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주께 있음을 안다.
나오는 말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6).”
지혜자는 외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 원 없이 살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게 다 허사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무슨 말인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이것이 오늘 연종의 때에 또한 새로 2020년 새해를 앞두고 지혜자가 간곡하게 우리에게 들려주는 성경의 핵심이다.
열심히 공부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이 출세와 성공을 위한 것이면 학자가 되고 박사가 되면 무슨 소용이겠나? 열심히 운동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저 건강을 돌보고 활력을 더해 ‘몸짱’이 되고, 100세 인생을 누리는 데 목적을 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나?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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